(교육복지 시리즈)방과 후 갈곳이 없어요

입력 2005-05-16 10:26:56

"학교 마치면 놀이터나 친구집에 가요. 할머니는 종이 줍는다고 바쁘거든요. 집에 가도 별로 할 일이 없어요." 미연(가명·11·여)이는 오늘도 학교를 마치고 놀이터로 향했다.

혼자서 미끄럼틀과 시소, 그네를 번갈아 탔다. 그래도 아무도 없는 집보다는 거리를 헤매는 게 낫다.미연이는 할머니와 함께 채 2평도 안 되는 20만 원짜리 월세방에 산다. "학원엔 안가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돈이 없는데 학원에 어떻게 가요?"라며 풀 죽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미연이 아빠는 이틀에 한번이나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간다. 종이를 줍는 할머니는 하루에 8천 원 벌이도 힘들다. 학교 특별수업시간에 컴퓨터를 배우는 것이 유일한 '과외 교육'. 컴퓨터를 살 돈도 없거니와 2평 방에는 컴퓨터를 들여 놓을 공간도 없다. 미연이 성적표에는 '수학 응용문제 해결능력이 모자라고, 체육활동에 활기가 부족하다'고 적혀 있다.

학교를 마치면 갈 곳이 없는 아이들. 끼니는 그럭저럭 해결한다고 해도 영어·수학이며 태권도·미술학원으로 달려가는 친구들을 그냥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 아이들은 '정신적 영양실조'를 앓고 있다. 교육당국과 지자체는 방과후 골목길을 서성이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진호(가명·12), 진희(가명·11·여) 남매는 학교를 마치는 대로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을 한다. 화·수·목요일 교회 공부방에서 1시간 동안 공부하는 게 과외수업의 전부. 나머지 날에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지낸다.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기 바빠 자신들과 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1년 전 건강식품 다단계 판매를 하던 아빠가 집을 나갔다. 엄마도 두달 전 세상을 등졌고, 할머니가 남매를 데려와 키우고 있다. 진호는 모든 물음에 퉁명스러웠다. 차가운 눈매에 극히 짧은 대답. 12세의 진호는 세상을 냉소적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방과후에 뭐 해보고 싶은 것 없니?"라고 물었다. "없어요. 근데 아저씨가 시켜줄 거예요, 쳇…." 한동안의 침묵. "왜 우리집에 와서 이래요? 아저씨 뭐예요? 놀리는 거예요?" 취재진과 한동안 신경전이 오고간 뒤 딱 한마디 진호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빠 기다린 게 벌써 1년도 넘었는데… 아빠는 거짓말장이예요."

진호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고 다녀야 할 정도로 허리가 좋지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들을 보육시설에 맡기려해도 눈에 밟혀 그럴 수도 없다며 눈물을 훔쳤다.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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