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조령은 능선산행으로 유명하다.
서쪽으로 7시간이면 헐티재 정상까지 가고 6시간을 더 걸으면 비슬산 정상에 도착한다.
동쪽의 대구 수성구 범물동 용지봉은 8시간 정도 걸리지만 난코스가 거의 없어 초보자도 쉽게 도전할 수 있다.
해발 497m의 청도 팔조령(八助嶺) 고갯길은 조선시대에는 동래(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관도였다.
수레가 넘지 못할 정도로 경사가 심했지만 항상 화물이 많이 모여 사람들이 붐볐고 이를 노리는 산적들도 득실거렸다.
그래서일까? 팔조령은 '장정 8명이 힘을 모아 함께 가지 않으면 고개를 넘을 수 없다 해서 팔조(八助)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주장과 '팔조령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이 새가 날아오고 있는 형상이라 입조(入鳥)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들입(入)자가 여덟팔(八)자로 변해 팔조(八鳥)령이 됐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게 험준했던 옛 팔조령 고갯길은 이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지난 1986년 아스팔트로 포장한 현재의 국가지원지방도(30호)도 5년의 난공사 끝에 지난 1998년 '팔조령터널'이 개통된 이후 터널 위 옛길은 인적이 드물다.
취재를 위해 마을을 떠나 옛길을 따라 정상까지 오르는 10여 분 동안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만날 수 없을 만큼 도로는 한적했다.
골짜기에는 4월을 붉게 태웠던 진달래꽃 대신 하얀 아카시아꽃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여덟 구비길은 산악자전거와 마라톤 선수들의 극기훈련 장소로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고갯마루 산장휴게소는 연인들의 차지다.
차량들이 새로 뚫린 터널로 몰리면서 오히려 호젓한 데이트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것.
산장의 주인 이종진(50)씨는 자칭 '팔조령 산지기'. 대구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산이 좋아 지난 89년 사표를 낸 후 줄곧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대구 도심에서 가까운 데다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 드라이브를 나온 연인들이 적지 않다"라며 "천체망원경을 갖춘 뒤에는 학생들과 동호인들의 발길도 늘어났다"고 귀띔했다.
팔조령터널 개통 후 주민들의 생활도 많은 변화가 왔다.
땅값이 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청도읍내 재래시장밖에 몰랐던 주민들의 생활권은 대구까지 넓혀졌다.
김세홍(74·이서면 팔조리)씨는 "장을 보기 위해 5일을 기다렸다 청도장을 찾곤 했는데 요즘은 수시로 대구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에 간다"며 "대구에 사는 아들과 손자들이 주말이면 찾아와 농사일을 돕고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경주사람들은 흔히 주변 지역과의 인접성을 따질 때 '사방 팔십리(四方 八十里)'를 거론한다.
경주 시내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감포까지, 서쪽으로 영천, 남으로 울산, 북으로 포항까지 거리가 모두 80리(32㎞ 내외)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같은 80리 길이라도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크게 차이가 난다.
경주를 기준으로 7번 국도로 남북이 연결된 울산과 포항까지는 자동차로 각각 30분에 주파할 수 있다.
영천 역시 4번 국도(현곡면 방면)와 28번 국도(안강 방면)를 통해 비슷한 시간대로 연결된다.
문제는 같은 경주시 행정구역 안에 있는 감포쪽. 인근 타 시·도는 30분 거리로 단축됐지만 감포는 여전히 40분대 이상 거리로 남아 있다.
토함산을 가로지르는 추령재(해발 310m)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난 98년 1월 4번 국도 추령터널이 개통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1시간 넘게 걸리는 길로 남아 있을 뻔했다.
착공 7년여 만에 개통된 추령터널은 국내 유일의 'S'자형 터널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어떤 이는 지질구조에 따른 공법상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시공업체가 부도로 몇번 바뀌는 과정에서 빚어진 문제라고도 한다.
또 양쪽에서 터널을 굴착해오다 접속지점이 어긋나면서 생긴 실수라는 믿지 못할 얘기도 있다.
그러나 경주시나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의 공식적인 답변은 "오래 전 일이고 당시 담당자들이 바뀌어 잘 모르겠다"는 것.
어쨌거나 터널이 생기면서 이곳 옛길 역시 산꾼들이나 연인들 또는 향수를 더듬어 온 중년들만 찾는다.
고갯마루 휴게소는 전통찻집으로 바뀌었지만 손님은 평일의 경우 4, 5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추령 옛길을 걸어서 올라가는 이들은 오어사가 있는 포항 운제산에서 출발, 토함산 불국사까지 산행을 하는 등산인들뿐이다.
특히 경주사람보다 울산 나들이객들이 많아 도로변에 세워진 승용차들은 울산 번호를 단 차 일색이다.
폭 9m, 총연장 621m의 이 터널이 생기면서 감포읍과 양남·양북면 등 토함산 동쪽 3개 읍면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터널 개통으로 경주시내까지의 거리는 4㎞ 정도(약 10분 거리) 단축되는데 그쳤지만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비로소 '전천후'로 바뀐 것.
예전에는 굽이굽이 고갯길을 돌아야 하는 탓에 비오고 눈오면 길이 끊기기 일쑤였다.
당일 팔아야 되는 활어나 각종 신선채소들은 하루 이틀 묵히면서 값어치를 상실하기도 했고 해안도로를 타고 포항권의 구룡포나 울산 쪽으로 원정판매에 나서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감포가 고향인 김정석(48)씨는 "터널이 뚫린 뒤 학교 때문에 경주시내에서 자취하던 학생이 많이 줄었다"며 "어릴 때는 밤새워 고개를 넘기도 했고 주말을 이용해 집에 갔다가 길 끊길 걱정에 선걸음에 바로 돌아나올 때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양북면사무소 한 공무원도 "터널이 뚫린 바람에 시내 집에서 출퇴근 가능한 곳이 됐지 그 이전 같으면 자취나 하숙을 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와 감포를 오가며 활어상을 하는 이상호(44)씨는 "어민들은 터널 덕에 당일 판매가 가능해 제값을 받을 수 있게 돼 좋고 도시 소비자도 신선한 수산물을 싼 값에 먹을 수 있어 좋지 않으냐"고 했다.
경주·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청도·정창구기자 jungcg@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