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곳 숨은 이야기-의성군 안사면 地藏寺

입력 2005-05-09 08:41:25

의성군 안사면 월소리, 지장사(地藏寺)는 얼핏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만 사찰처럼 보인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만 전해올 뿐 상세한 연혁과 사적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주문을 연상케 하며 서 있는 10여 개의 돌탑과 절 입구 하마비(下馬碑)는 이곳이 무수한 사연과 적지않은 곡절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공양간 옆에 세워져 있는 하마비는 왕실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나 마찬가지입니다.

왕장이나 성현, 명사, 고위관리의 출생지나 분묘에 세워 존경을 표하는 일종의 금표로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죠."

주지 동효 스님의 설명처럼 하마비는 현재 경남 고성의 옥천사와 전남 순천의 선암사, 경북 영천 은해사, 대구 파계사에만 남아있다.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자 영조의 어제완문을 보관하던 사찰이고, 팔공산 파계사는 성종, 숙종, 덕종, 영조 네 분의 신위(神位)를 모시던 왕실의 원당(願堂)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지장사의 하마비는 언제 세워졌고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에 걸려있는 '지장사' 편액이 어느 때인가 숙종이 이곳에 들러 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감안하면 숙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일단 추정할 수 있다.

또 숙종이 하마비와 함께 어각(御閣)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각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숙종실록이나 역사연표를 더듬어보면 숙종(1674∼1720)의 어차 기록은 없다.

하지만, 1699년 한양을 비롯한 전국에 전염병이 창궐해 25만여 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숙종이 전염병을 피해 지장사를 찾았고 이후 하마비와 어각이 세워졌다는 이야기도 숙종의 어차를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동효 스님은 "지장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숙종의 어필(御筆), 하마비 등 유물들을 살펴보면 어떤 식이든 조선시대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장사에는 명성황후 민씨와 관련한 이야기들도 전해오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가 충주와 상주를 거쳐 지장사로 난을 피하고 축원문을 남기고 돌아갔다는 것.

당시 명성황후가 지장사로 들어올 때 마차를 끌던 말이 하마비 앞에서 꼼짝도 하지않아 칼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명성황후 이야기는 조금 과장됐다는 설도 있다.

오히려 후사(後嗣)가 없던 명성황후가 왕자의 탄생을 기원하기 위해 상궁(尙宮)과 나인을 지장사로 보내 기도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장사에는 명성황후가 지은 '축원문'도 보관돼 있었다고 동효 스님은 전했다.

또 지장사와 월소리에는 명성황후가 머무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궁인(宮人)을 희롱하다가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정말 명성황후가 왔더라면 목숨을 잃지않고 곤장 몇 대로 형벌을 끝냈을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한편, 지장사에는 '철창 속의 부처님'이란 이름으로 세계불교 책자에 실리기도 한 '의성 월소동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6호)'이 모셔져 있다.

원래는 부근의 산에서 출토, 쌍호초등학교에 보관하고 있던 이 고려시대 불상은 2003년 12월27일 지장사로 옮겨왔다.

동효 스님은 "지장사에 명성황후와 숙종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와 불교계 안팎의 관심을 끌고 있으나 시급한 것은 20여 년 전에 무너져내린 청풍루를 복원하는 것"이라며 행정기관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의성·이희대기자 hdlee@imaeil.com사진: 숙종대왕이 내린 하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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