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즐거운 편지

입력 2005-05-06 11:30:31

문학은 때로 사람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영화 '편지'를 보던 때였다. 익숙한 시 한 편이 '환유'가 '정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었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였다.

그 시를 읽는 장면에서 내 의식이 순간적으로 정지됨과 동시에 작은 울림이 가슴을 통해 느껴졌다. 이내 기억은 15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대학 1학년 가을 어느 날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맘때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이겠지만 난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마음의 창은 늘 어둠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가끔 자살 충동도 일어 도루코 면도날이 내겐 매력적인 자살도구로 보인 때도 있었다.

학교는 결석하는 날이 많았다. 방황의 끝이 어딜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때였다. 신앙의 힘으로 겨우겨우 견디어 가고 있을 때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수취인란에 내 이름자만 선명히 적혀 있는….

개봉하자 연한 분홍빛 편지지에 곱게 써내려간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바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였다. 보낸이는 '너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친구가'라는 모호한 정보만 남겨 두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을 친구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 삶을 반추했다.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나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친구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를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

그 결심의 첫 열매로 그 시가 실린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을 구입했고 지금도 날깃날깃한 꺼풀로 내 서재에서 나의 삶을 비추고 있다. 그 시가 주었던 감동과 친구의 따스한 우정을 잊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이제 내 마음의 삼남에 내리는 눈도 그쳤다. 앞으로 다시 모진 바람과 함께 삼남에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즐거운 편지는 또 나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노상래 영남대 국문과 교수

▨약력

△영남대 국어국문과 졸 △동 대학원 석'박사 △영남대 국어국문과 교수, 영남대신문 부주간 △저서 '문예사조의 이해' '한국 문인의 전향 연구' '박영희 전집' 등, 논문 '김사량의 창작어관 연구' '광장에 나타난 상징성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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