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내 생의 적들

입력 2005-04-29 10:48:06

이인휘가 8년 만에 내놓은 소설 '내 생의 적들'은 묻는다. 늘 나섰던 거리, 주춤해왔던 거리, 천개의 얼굴을 가진 거리, 만개의 희망인 척하던 거리, 공포와 실망이었지만 끝끝내 돌아왔던 이 거리에, 희망 희망이라니, 희망이란 게 무엇인가, 당신과 나 사이에, 나와 세상 사이에….

동아리방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던 나름대로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던 가난하고 평범한 대학생 김광훈. 그 영혼이 1980년대의 부정한 권력의 변화에 의해 어떻게 무참히 깨어져갔는지, 그 공포와 슬픔과 고통을…, 그 이후로부터 24년간 그가 겪어야했던 삶의 우여곡절과 함께 신랄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약하고 불안한 내 안의 적들과 내가 상관없는 것들이라고 외면했던 내 밖의 적들이 가한 모순들을 헤치며 여기까지 빛을 찾아온 게 틀림없음을 스스로 확인시키는 '문학적 혁명성'(황광수)을 지니고 있다.

과거와 결별하지 못하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버릴 수 없는 꿈을 위하여, 어두운 시대를 뚜벅뚜벅 걸어나와 우리시대까지 이어진 삶의 초상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이 시대의 난제인 '과거사 극복'의 그 지긋지긋한 장기지속성은 결코 법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김광훈이 전전했던 여인숙, 고문실, 군대, 가리봉동 벌통집, 시골축사 등등의 공간들은 김광훈으로 표상되는 그 참담했던 시절의 밀실들이었다.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으며, 또한 국가폭력의 어두웠던 기억들이었으며, 지금은 역사의 광장으로 향하기 위한 내밀한 공간이 되어 역사적 퇴화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24년 동안 이 거리에서 도대체 무슨 일어난 걸까요'라며 참담하게 물으며 주인공을 통해 작가가 바라다보고 있는 지점은, 무엇보다 국가폭력의 무수한 기억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작가 자신의 신체와 기억에 각인되어 있음을 증언한다.

그러니 가리봉 사거리가 디지털거리로 또는 첨단산업단지로 변해가고 있으며, 옛 벌통집은 이제 그 흔적만 남은 채 철거될 운명에 처했다 할지라도 '희망'을 향한 사유와 연대는 지속되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고영직)

고희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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