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독일군의 저항에 오마하 해변은 피비린내뿐이다. 총탄이 물 속까지 날아 핏물이 흥건하고 바다 위를 떠도는 시체들.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 배경음악도 잠시 침묵. 압권이다. 용케 살아 남은 행운아 밀러 대위. 그러나 행운도 잠시. 다시 전쟁에 참가한 네 형제 중 세 형제가 전사했고 실종된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졸병 라이언을 구하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감독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다.
라이언 일병은 구해진다. 물론 희생도 따른다. 여기까지는 공식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뒤통수가 긁적거려진다. 일등병. 왜 그 한 사람을 위해 대원 여덟의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어떤 등가(等價)의 원칙과 가치가 존재하는가. 과연 그런 전쟁은 그 나름의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이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영화에서만 가능한가. 장 콕토의 말대로 "전쟁은 개가 벼룩을 털 듯이 지구가 인간을 털어 내는 자연적인 현상"일까. 지금 경북 영천(永川)에는 그런 전쟁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일병을 구하기'위한 영화감독들이 대거 모여 벼룩을 털 듯 서로를 털어 내고 있다.
유시민 감독. 독재정권에 빌붙어 출세한 패거리 TK에 진저리를 낸다고 했던 그가 '지원단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영천에 왔다. 이 지역에서 열린우리당이 사랑 받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고향을 챙기겠다며 자신만만하다. 넘쳐 보인다. 이런 자신감 때문에 오해도 살 만하다. 그래서 "(이 지역)맹주 쟁탈권은 아니다"며 토를 단다. 그게 순수해서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가 찍은 영화는 뻔하다.
박근혜 감독. 전혀 메가폰을 잡아 본 적 없는 폼이다. 그러면서 손에 파스 붙이고 민박한다니 영판 영화감독이다. 그 역시 넘치는 것은 마찬가지. 한나라당 주연배우를 제치고 직접 화면 속으로 뛰어들어 열심히 민심을 촬영하기 때문이다. 그게 순수해서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가 찍은 영화 역시 뻔하다. 배우가 얼마나 시원찮으면 감독이 유권자들 앞에서 "내가 직접 영화 찍겠다"고 야단이겠는가.
그밖에 많은 감독들이 봄도 여름도 아닌 뙤약볕 아래 전쟁한답시고 마구 총질이다. 열린우리당은 '기업도시'로 만들어 주고 굵직한 공공기관도 유치하겠다며 큰 소리다. 10년을 넘게 한나라당이 영천에서 한 게 뭣이냐며 삿대질도 예사다. 무슨 돈줄을 쥐고 있는지 10조 원을 끌어오겠다고 큰소리다. 안방에서 당하고만 있는 것이 억울한지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이 집권당임을 내세워 헛 공약만 남발하고 있다며 "면목 없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뭇 애원조다. 어쩌다 영천에서 이런 영화가 촬영되고 있을까. 애달프다. 졸병하나 구하는데 무려 10조 원을 들이다니. 이라크전도 아니고. 애원조로 졸병을 구하는 것도 솔직히 가관이다.
영천 민심이 천심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 천심을 알 수는 없다. 지금 영천은 무슨 민심이며 천심일까. 어떤 유권자는 이번 기회에 갈아엎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고 떵떵거리고 다른 유권자는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며 눈을 부라린다. 그런다고 민심이 달리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천심이 박빙의 승부에 걸려 좌우되어서야 우리의 미래는 영원히 박빙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박빙이라며 저 야단들이다. 발레리가 "선거야말로 우리 사회의 최대의 암"이라고 지적한 것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 오늘이다.
4'30 재'보선. 격전지 영천도 이틀 후면 평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결과는 평상일 수 없다. 졸병을 구한 솜씨가 '2007년의 장성 구하기'로 연장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천의 민심'을 결코 앞으로 있을 대선의 경계로 삼지는 말아야 한다. 어느 한편은 반드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결과에 영천 민심만 뒤통수를 맞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정치판'이 '노름판' '싸움판'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우려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스필버그 감독이 우연히 영천을 지나다 이런 모습들을 보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냥 웃을게다. '일병 구하기'가 인간의 준엄한 생명을 그 가치기준으로 삼았다면 영천선거도 결국은 그랬어야 한다고 거들면서 말이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누가 그들에게 4월은 엘리어트 못지 않은 '잔인한 달'로 마감해질까 궁금하다. 그저 영천만 '황무지'가 아니 되었으면 하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金 埰 漢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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