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왔던 이웃이 이사를 갔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저녁에 귀가하니 곱게 포장된 책 한 권이 남겨져 있었다."이웃사촌 정나누며 살아온 지 10여 년이 넘었네요. 참 긴 세월이다 싶으면서도 마음 가는 만큼 평소에 더 잘 해드리지 못함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라는 쪽지와 함께.
가끔씩 얼굴이 마주칠 때면 언제나 미소를 짓던 그녀. 일을 갖고 있어 늘 동동거리며 살면서도 지짐이나 호박죽 같은 별미를 만들 때면 맛보라고 종종 보내오곤 했다. 자주 오가는 사이는 아니어도, 집열쇠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렇게 해도 그리 미안하지 않은 그런 푸근한 이웃사촌이었다.
이사철이다. 주말이면 고층 사다리가 내걸리고, 크고 작은 짐들이 오르락 내리락 분주하다. 이사도 고급화 추세라 대부분 포장이사다. 예전엔 이삿짐 구경하는 재미도 적잖았는데 요즘의 포장이사는 쌍둥이마냥 똑같아서 싱겁다. 아주 간혹, 가재도구를 그대로 드러낸 이삿짐 차를 보면 생경스럽다. 대개 그런 이삿짐들은 초라하다. 먼지투성이 플라스틱 빗자루까지 달달 떨며 실려가는 광경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사람이란 묘해서 대개는 제 살던 곳을 쉬 떠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이 분지(盆地)의 사람들에게 그런 성향이 더욱 강한 것 같다. 같은 대구로 옮길 때도 살던 구(區) 안에서만 맴돌려 한다. 경북이나 다른 지역에서 이사 온 사람들도 고향 쪽 방향에다 터를 잡는다. 우리 DNA 속에 녹아있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정서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또 누군가에겐 떠나가는 사람이 된다. 21세기엔 누구나 목초지를 따라 옮겨가는 유목민처럼 살 것이라고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가 내다보았듯 삶의 여건에 따라 수시로 장막을 옮기는 신(新) 유목민은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이동의 속도를 마음이 따라가지 못함인가. 정든 이들과 헤어질 때마다 가슴에 작은 구멍 하나씩 뚫리는 것 같다.
짐들만 오가는 요즘의 냉랭한 이사 모습을 보니 옛노래'이사 가던 날'속의'돌이'가 그리워진다. 소꿉놀이 각시동무와 헤어지는 게 하도 서러워서 장독 뒤에 숨어 울던 돌이, 그래도 여전히 서운해서 애꿎은 탱자꽃만 흔들어대던 뒷집 아이 돌이. 떠나가고 떠나보내는 정이 동심원(同心圓)으로 겹쳐지던 모습은 이제 정녕 사라진 걸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