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들여다보기-브루셀라 확산-농가는 지금

입력 2005-04-14 08:49:25

자식 같은 소 殺처분 "가슴에 묻어"

"내 몸처럼, 내 자식처럼 키우던 소를 죽여야 하다니….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한달 전 소 10여 마리를 땅에 묻은 영주의 50대 축산농 ㄱ씨는 흘릴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남은 소라도 건강하게 자라줄지 막막하기만 하다.

15년째 축산업에 종사해온 그에게 남은 자산이라곤 텅 빈 축사와 허탈감뿐이다.

부농의 꿈을 꾸며 수억 원을 대출받아 축사를 짓고 소를 키워 온 그는 브루셀라 병에 감염된 소를 갖다 묻고 걱정만 늘어가고 있다.

"대출 빚도 갚아야 되고, 자식 학교도 보내야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저 걱정만 앞섭니다.

" 소 브루셀라 병으로 경북지역 축산농들의 주름살이 더욱 깊게 패고 있다.

더욱이 브루셀라 병은 숙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채 확산일로에 있어 축산농가의 고민은 더욱 커지고만 있다.

요즘 지역 축산농가들 사이에서는 '밤 새 별 일 없느냐'라는 인사가 유행이다.

계속되는 브루셀라 병 공포로 생겨난 인사법이다.

짧은 인사에 이어 "그 집 소는 검사 결과 나왔어요? 우린 아직까지 안 나왔는데…."라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묻고 답하는 짧은 시간에도 공포의 연속이다.

"다음 장에 소를 내다 팔아야 한다"는 김대근(43·영주시 상망동)씨는 "브루셀라 병 감염 여부 검사를 의뢰해 놓고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다"며 "소 사육농가들은 혹시나 이 병의 불똥이 튈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사람 만나기가 겁난다"며 "이곳 저곳에 내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가슴만 답답하다"고 털어놓았다.

김씨의 말처럼 축산농들은 요즘 입조심에 말조심이 더해져 점점 벙어리, 귀머거리가 돼 가고 있다.

감염된 소를 도살한 영주의 한 농가는 "자신의 축사에서 브루셀라 병이 발생한 사실이 알려질까 이웃 만나기도 겁이 난다"며 "자식처럼 키운 소를 땅에 묻어야 하는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며 긴 한숨만 내쉬었다.

100여 마리의 소를 키우는 장모(54·영주시)씨는 "행정당국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해 발병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등 오히려 질병을 확산시키고 있다"며 "농가들이 도살처분한 사실을 쉬쉬하며 은폐해 정확한 피해상황도 파악되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동의 김모 이장은 소 20여 마리를 죽여야 했던 이웃 한 젊은 부부 축산농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부부가 온 정성을 다해 기른 소가 브루셀라 병에 걸려 모두 죽고 난 뒤 망연자실, 아예 마을 사람들과도 거의 접촉을 끊다시피하며 집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 이 부부의 불행이 퍼질까 이웃 농가들도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고 김 이장은 전했다.

경북 도내에서 가장 많은 소를 키우는 경주지역 분위기도 마찬가지. 경주시 안강읍의 한 축산농민은 "브루셀라 병에 대해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되고 있다"면서 농가 분위기를 전했다.

대규모로 소를 키우는 농가의 경우 브루셀라 병원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예 외부와의 사소한 접촉도 피하고 있는 실정. 경주 강동면 한 농가는 큰길에서 농장으로 통하는 길 입구에 '출입금지' 간판을 세워 두고 외부인 출입을 차단하고 있다.

경주 외동읍 한 농가는 도축이나 매매 등 거래시에만 필요한 브루셀라 병 검사를 팔지도 않을 소까지 받게 하는 등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고 천북면 한 농가는 브루셀라 병이 숙질 때까지 사거나 파는 등 소 거래를 중단하고 있다.

경주시 관계 공무원은 "전체 사육두수에 비해 발병률은 아주 낮지만 방역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당국에 대한 축산농민들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적절한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안동의 한 축산농가는 "최근 브루셀라 병이 확산돼 우리 마을도 끝내 화를 입고 말았다"며 "이 지경이 되도록 당국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당국의 비공개 행정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축산물 이미지가 떨어지고 쇠고기 소비심리가 위축돼 소값 폭락사태가 우려되는 등 사육농가 보호차원에서 어쩔 수 없다는 측면은 이해하지만 감춘다고 질병이 근절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수의사 박모(41·안동시 용상동)씨는 "당국이 병을 숨기려다 확산시키는 잘못을 하는 꼴" 이라며 "이번 기회로 정확한 실태를 공개하고 확실한 근절대책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정경구기자 jkgoo@imaeil.com 경주·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영주·마경대기자 kdm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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