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인 만세시위 3'1운동이 있은지 대략 한 달 뒤인 1919년 4월 8일 평안북도(현재 자강도 소속) 강계 장터, 한반도의 북단에 위치한 이곳에서도 독립을 위한 한민족의 큰 외침이 있었다. 평양신학교 학생 주하룡이 정준'한봉민'김경하 등과 함께 자신이 들여온 독립선언문을 읽으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던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3'1운동처럼 일제의 학살에 실패했지만 압제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보여준 의미있는 봉기였다.
이날 학생들에 장꾼까지 합세해 수백 명으로 불어난 사람들은 다함께 조선독립을 부르짖으며 감격의 순간을 나누었다. 시위군중들은 계속 늘어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힘찬 행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경찰서로 걸어가는 시위대들에게 일본 경찰이 무차별사격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시위군중이 도착할 때를 기다려 비인간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이날의 학살로 인해 정준이 가장 먼저 쓰러져 죽었고 천도교인 김병찬, 상인 손주송, 전도사 인국원의 부인 한씨(韓氏) 등이 목숨을 잃었다. 한씨부인은 당시 임신 8개월이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수십 명도 모진 고문을 받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탁창국'김명하는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한 달 만에 순국했다. 다시 한 번 조선민족은 일제의 총칼 앞에 독립을 향한 순수 의지를 잠시 꺾이고야 말았다.
▲1450년 조선 세종 승하 ▲1895년 덕수궁에 최초로 전등 사용 ▲1946년 국제연맹, 제네바서 마지막 회의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33명 사망 ▲1989년 연극인 이해랑 사망.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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