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9일 도예종·서도원·하재완·이수병·김용원·송상진·우홍선·여정남씨 등 8명이 대법원의 사형선고 하루 만에 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은 1970∼1980년대 국가기관에 의한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알려진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계자들이다.
당시 이 같은 군사정권의 폭정을 두고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인혁당 사건을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우선 조사대상 7건 중 하나로 선정해 다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진상규명이나 보상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 인혁당 사건 30주년 추모행사=인혁당대책위원회와 천주교 인권위 등 관련단체들은 8일 인혁당사건 희생자 8명의 30주기 기일을 맞아 인혁당·민청학련 관련자 중 숨진 총 21명을 위한 추모제를 지낸다
이들은 이날 오후 4시 서대문 독립공원 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찾아 참배를 하는 데 이어 오후 6시부터 명동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를 거행한다.
천주교 인권위 관계자는 "인혁당 사건 30주기를 맞아 과거사 청산의 중요성과 의지를 확인하는 자리"라며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과거 모든 의문사건과 조작사건들의 진상규명을 위한 올바른 과거청산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정현 신부는 "이미 70줄에 들어 희생자 유가족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이들이 '사법살인'인 인혁당 사건의 법적 제도적 해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다면 희생자인 남편과 아들들에 얼마나 죄스럽겠느냐"고 물었다.
◆ 국정원, '우선조사' 사건으로 선정=인혁당 사건은 최근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KAL 858기 폭파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등과 함께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8년 4월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하면서부터.
관련자들 증언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 인혁당 사건의 진상은 2002년 대통령 산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직권조사에 착수, 이 사건이 국가권력에 의한 조작사건임을 공식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2003년 11월 유현석·이돈명·한승헌씨 등 '인권 변호사'들로 구성된 변호인단이 구성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아직까지 재심의 개시 여부조차 결정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올해 초 국정원이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발족한 뒤 인혁당 사건을 우선조사 대상 7건 중 하나로 선정했으며 조사결과는 연말께 나올 예정이다.
◆ 진실규명·명예회복 진척 미비=그러나 사형 선고 하루 만에 형 집행이 이루어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건을 둘러싼 명쾌한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희생자 유족 등 관련자들의 명예회복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 2000년부터 피해자 개인별로 접수하고 있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혁당사건에 대한 판단을 수년째 미루고 있다.
세부적인 검토가 필요하고 국정원이 조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를 참고한다는 해명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실무분과위에서 수차례 심의했고 사건검토까지 어느 정도 끝났지만 추후 진행에 따라 추가 검토가 있을 수 있다"며 "국정원으로부터 조사결과자료를 받고 세부적 진술을 보충, 심의하기 위해 최종결정을 보류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 어느 정도 드러났고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인혁당사건을 이미 국가권력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고 밝힌 상태에서 시간을 끄는 것은 희생자들과 유족들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은 "이 사건에 연루된 억울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염원"이라며 "민주화보상심의위가 신속히 결정을 내리지않는 것은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며 희생된 분에 대한 잘못"이라고 말했다.
함 이사장은 7일 사건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청와대에 탄원서를 냈다.
유족들 사이에 '인혁당 당수'로 통하는 문정현 신부도 "세상에 진실이 다 드러난 사건인데도 왜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마치 우리 사회에서 이미 시대적 수명을 다한 국가보안법이 질기게 연명하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 인혁당 사건이란=인혁당사건은 1·2차로 나뉜다.
1964년 8월14일 발표된 제1차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과 대일 굴욕외교 반대시위가 거셌던 시기에 일어났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재판부는 1965년 6월29일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도예종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는 등 전원 유죄 판결했으며, 같은 해 9월21일 대법원은 항소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다.
제2차 인혁당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불린다.
1973년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반(反)유신 운동'이 확산하는 가운데 '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배포됐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음해 4월 긴급조치 4 호가 선포되면서 민청학련과 그와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했던 시기에 발생했다.
이어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도예종 등 8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됐으며, 20여 시간만인 그 다음날 4월9일 사형이 집행됐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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