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목표는 소극장 갖는 것"
'구부정한 몸에, 팔자걸음, 항상 점퍼차림에 멋 부릴 줄 모르는 시골 농부 같은 외모, 그리고 전형적인 경상도 사투리로 어떻게 연극 무대에 줄곧 서왔는지 의문이다.
' 연극인 김삼일(63·포항시립극단 연출가)씨에 대한 원로 극작가 노경식씨의 촌평이다.
하지만, 그를 직접 만나보면 연극판에서 40여 년 동안 80여 편의 작품에 배우나 연출가로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또렷한 눈빛에서 피어오르는 연극에 대한 쉼없는 열정이 아마도 그가 지난해 제14회 이해랑연극상과 최근 제1회 홍해성연극상을 잇따라 수상한 이유가 아닐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극인들의 이름이 걸린 큰 상에 저를 호명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한편으로 감격스러워 목이 메고, 다른 한편으론 죽을 힘을 다해 연극에 매진하라는 채찍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씨는 30일 홍해성연극상 초대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홍해성연극상은 대구가 낳은 한국 신연극계 최초의 전문연출가이자 연극운동가인 홍해성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홍해성기념사업회(회장 이필동)가 올해부터 대구예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제정한 연극상.
1930년 유치진, 서항석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해 활발한 활동을 한 홍해성이 친일파로 알려져 있는데 수상이 찜찜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펄쩍 뛰었다.
"그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지요. 계성중학을 졸업한 홍 선생이 일본 유학시절 축지(縮地) 소극장에서 배우 활동을 했다는 것 때문에 잘못 알려진 소문일 뿐입니다.
김씨는 오히려 "홍해성 선생은 이 땅에 신연극을 심은 선구자이자, 순수연극단체인 극예술연구회의 리더였다"며 "대구 출신인데도 지역민들에게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말을 이었다.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난 김씨는 고래잡이철마다 생선창고 가설무대를 찾아오는 신파극단의 연극을 보며 자랐다.
삼촌은 이 극단 대표이자 배우였고, 아버지도 춤과 노래를 잘 해 그에겐 예능 기질이 많았던 셈이다.
10대 중반부터 어려운 가정형편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유일하게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은 연극이었다.
"1964년 대구에서 '태백산맥'이라는 극단이 배우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오디션을 봤지요. 40년의 연극인생이 시작되는 첫걸음이었어요." 평생 연극친구인 이필동씨와 지금은 고인이 된 황철희를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고 했다.
"무척 힘들고 배고픈 시절이었습니다.
대구에 연고가 없는 저는 1평짜리 독서실에서 기거하며 하루 한끼 먹기조차 어려웠지요. 그래서 이필동씨 신세를 많이 졌어요. 대봉동 집에서 정성스럽게 밥을 해주시던 아주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
그해 겨울 그는 포항에서도 극단 '은하'를 창단했다.
현재의 포항시립극단의 전신인 '은하'에서의 활동을 토대로 1969년부터 그는 줄곧 포항 연극무대를 지키는 연극운동가로 나서게 된 것. "당시 이해랑 이동극장 오디션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이해랑 선생이 면접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서울만 연극하는 곳이 아니지. 지역에도 연극운동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 하면서요. 섭섭했지만 포항에 연극의 씨앗을 뿌리자는 오기도 생기더군요."
이후 김씨가 연극에 쏟아부은 정성과 열정은 1985년 제3회 전국연극제에서 '대지의 딸'로 대통령상을 거머쥐게 했고, 1989년 제7회 전국연극제에서도 '산불'로 문공부장관상과 여자연기상을 수상하게 했다.
그동안 그가 무대에 올린 80여 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대부분 사실주의 작품이다.
사실주의 정통극만을 고집하는데 이유가 있을까. "부조리극이나 해체극보다 무대 위에서 일상생활을 표현할 수 있는 사실주의극이 더 진실하고 영원합니다.
연기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리얼리즘 연극이지요. 기초가 탄탄해야 해체나 변화도 줄 수 있는 겁니다.
"
현재 대경대 강단에 서고 있는 김씨는 제자들에게 항상 맑은 영혼을 가진 연기자가 되라고 연기자의 정신을 강조한다.
"연기에 발을 들여놓은 후배들에게 항상 부탁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연기라는 옷을 아껴 입으라는 것입니다.
아무 곳에나 앉고 아무렇게나 관리해버리면 그 옷은 가치가 없어지게 마련이지요."
최근 지역에 불고 있는 소극장 개관 붐에 대해 김씨는 무척 부럽다고 했다.
"평생 연극판에서 사는 사람의 가장 큰 소원은 자신의 뼈를 묻을 소극장 하나 갖는 겁니다.
연극인에게 소극장은 새 생명이 부활하는 의미이지요." 40여 년을 '연극'이라는 두 글자만으로 살아온 김씨의 다음 목표도 소극장이다.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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