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요-'도시에서 귀향한 3형제 꽃농사꾼

입력 2005-03-26 08:48:01

"나도 한 때는 꽤(?) 잘나가던 트로트 가수였는데 이제는 어엿한 꽃농사꾼이 됐어요."

칠곡군 왜관읍 금남리 화훼단지 형제농원. 널찍한 비닐하우스 속에 핀 알록달록한 꽃송이 틈에서 구본대(54)씨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사시사철 비닐하우스에서 살다시피 하는 구씨는 요즘 대국(大菊) 가꾸기에 정성을 쏟고 있다. 본대씨의 동생 본천(50)·본주(47)씨도 이 동네에서 함께 꽃농사를 짓고 있다.

3형제는 모두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번듯한 사업체를 운영했던 사장 출신이지만 하나 둘씩 고향으로 돌아와 모두 꽃농사에 매달리고 있다. 맏형인 본대씨가 1995년에 귀향한후 꽃농사를 시작한 뒤 본천씨도 부산에서 운수업을 하다 1997년 귀향했다.

본주씨는 과채류를 기르다 이제 화훼 영농으로 전환하고 있다. 대국과 스프레이 국화가 주종이다.

영남대 축산과를 졸업한 본대씨는 대학시절 트로트 가수를 꿈꾸었고 음반도 냈다. 대학졸업 후 부산의 외국선박회사에 들어거 16년간 회사원 생활을 하다 1994년에는 친구와 무역회사를 차려 사업도 했다. 당시 러시아를 대상으로 건축자재와 음료수, 책·걸상, 가구 등 잡화품목을 수출했다.

그러나 잘나가던 회사는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러시아측 주 거래선이 파산해 28만 달러를 떼여 도산하고 말았다. 본대씨는 사업을 접고 귀향했다. 포항과 부산에서 운수업을 하던 동생 본주씨가 사업을 접고 먼저 고향에 와 노모와 오이농사를 지으며 자리잡고 있었다. 이미 꽃농사를 짓고 있던 두 가구와 연계해 꽃농사로 새인생을 시작한 것.

능숙한 솜씨로 꽃을 매만지며 외국종 꽃 이름을 줄줄이 꿰는 본대씨의 폼새는 전문 화훼농사꾼의 냄새가 풀풀 난다. 벌써 꽃농사 경력이 10년째. 주위에선 꽃박사라고들 한다.

하지만 구씨는 "그동안 꽃 키우는 실험만 했다"며 겸손해 했다.

"꽃은 만개하는 때를 잘 맞춰야 해요. 채화 시기를 잘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그래야 꽃이 최고로 예쁜 모습을 갖출 때 도시 소비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맨손으로 국화를 손질해 본대씨의 손바닥은 온통 검푸른 국화잎색으로 물들어 있다. 장갑을 끼고 작업하면 감각이 투박해져 능률이 안오르기 때문이란다.

칠곡군 낙금화훼단지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과수단지였으나 30여년 전부터 오이 집산지로 변했고 요즘은 과채류와 화훼단지로 변했다. 낙동강 유역의 기름진 땅이어서 어떤 작목이라도 잘 자란다.

낙산리와 금산리의 화훼농 13명은 낙금화훼작목반을 구성, 지난해 일본으로 5천600만 원 어치를 수출했고 올해 목표는 1억 원이라고 한다.

3형제의 농장은 다른 곳에 위치해 있다. 재배하는 꽃 종류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출하 작업은 언제나 함께 한다.

형제들은 "꽃은 국내 경기에 가장 민감한 품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활로를 수출에서 찾고 있다. 수출시장은 일본이다.

본대씨는 "일본수출은 춘분과 오봉절(8월15일), 추분과 연말때 꽃소비가 가장 많아 이시기에 가격을 잘 맞춰야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올해 춘분 때는 수출가격이 낮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본대씨는 최근 '리시안시스'라는 새 품종과 화훼농가의 농한기인 여름에도 일할 수 있는 '씨백합' 을 개발하고 있고 가을에 일본 수출도 계획하고 있다.

칠곡·이홍섭기자 hs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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