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돈은 소금물이다

입력 2005-03-24 11:53:15

우연히 '맨 발의 천사 최춘선'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미 인터넷 동영상으로 엄청난 반향을 얻고 있는 터였다. 전직 방송국 PD 출신의 김우현 감독이 지난 95년 서울의 지하철에서 괴상한 몰골의 한 80대 할아버지를 우연히 목격한 뒤 7년간 찍은 다큐멘터리다.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다니며 종교적인 글과 독립지사 같은 글을 쓴 종이를 붙이고 다니는 할아버지를 그도 처음엔 이상하게 여겼다.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미스 코리아 유관순!,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와이 투 코리아(Why two Korea: 왜 두 개의 한국이냐)"'''.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광인 취급했지만 할아버지는 당당했다. 김 감독은 '와이 투 코리아'에 "모든 사람이 유관순이나 안중근 같다면 왜 남북한이 갈라져 있겠느냐"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면서 할아버지의 외침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30여년간 맨발로 살아왔다. "통일될 때까지는 신지 않겠다"가 이유였다. 알고보니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움막에 살 것 같은 차림이었지만 서울 한남동에 반듯한 집이 있었고, 부인과 슬하에 교육자 자녀를 다섯명이나 두고 있었다. 도쿄 유학을 했고,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수재였음도 알게 됐다. 엄청난 토지를 가진 부자였지만 그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는데 동네 서너개가 될만한 규모였다. 할아버지는 2001년 그날도 광야의 선지자처럼 외치다가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매일같이 빵을 사서 노숙자나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주었고 많은 봉사활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거칠고 부르튼 그 발은 '사랑과 나눔의 발'이었다.

눈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내렸다. 그리고 가슴이 아파왔다. 자신의 소유를 모두 나누어 주고도 광인으로 멸시당했던 삶, 분단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맨발로 살아야 했던 할아버지의 고통이 가슴을 저미게 했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욕심의 악취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도대체 돈이 무엇이며 땅이 무엇이란 말인가.

억대의 보험금 욕심에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청부 살해하려하는 세상. 유산 다툼으로 형제들이 철천지 원수가 되고 가족이 조각조각 나는 일이 비일비재인 세상. 돈 앞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눈에 안보이는 이 한심스러운 세태. 공직자들의 구린내 나는 재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 경제를 살려낼 구원투수로 주목받았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도 결국은 부동산 불법 투기 문제로 낙마했다. 시민단체 대표를 지냈던 율사 출신의 최영도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도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물러났다. 두 사람 모두 부인들이 관여돼 있었다. 수신(修身)은 했을지 모르지만 공직자의 기본 덕목인 제가(齊家)에는 실패한 셈이다.

고위 공직자 인사 때마다 불법'탈법으로 인한 재산 비리가 터져나와 인생 전체에 불명예 낙인이 찍히는 사례가 질기게도 이어진다. 청렴한 줄 알았던 인사가 온갖 편법과 속임수로 재산을 부풀린 경우를 보면 '당신 마저도!' 라는 배신감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치졸한 방법으로 치부를 했다면 공직을 맡지나 말 것이지 왜 덥석 맡고서는 일이 터지면 "몰랐다"느니 "사실은 그게 아니다"라느니 변명을 하는가.

그 명예만으로도 대대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사람들이 뭐가 모자라서 부(富)까지, 그것도 철철 넘치도록 가지려고 하는가. 모름지기 명예와 부를 양 손에 한꺼번에 잡으려는 자는 최소한 공직 욕심 만큼은 내지 않는, 그런 양심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성실한 기업 운영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개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녀에게는 물질적 유산 대신 근면과 성실'정직'봉사정신을 물려주었던 류일한(柳一韓) 박사 같은 이가 그립다. 다행히 유명 인사들 가운데 "자식에게 유산 상속하지 말고 정신의 유산을 물려주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서히나마 확산되고 있어 희망을 갖게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돈은 마실 수록 갈증이 나는 소금물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 부유한 사람임을 최춘선 할아버지의 삶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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