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우수도 경칩도 지나고 바람에 봄이 잔뜩 묻어난다.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남들 다하는 체험학습이란 거 한번 못해준 탓에 몇 가족이 모여 함께 봄나들이를 하자는 아내의 제안에 선뜻 따라나섰던 지난봄이 다시 생각난다.
경주'세심마을'. 그저 다른 민속촌 같은 곳이려니 하며 아무 기대 없이 애들 신나게 놀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출발했던 곳이었다. 우리가 묵을 곳으로 정한 데는 일반 가정집인 영미네였다. 그 집에서 토속 전통 음식으로 우리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기른 봄나물, 2년 동안이나 땅에 묻어둔 김치, 도시에서는 그게 뭔지도 모를 시금장에 구수한 된장까지. 그런 음식에 익숙하지 않았을 아이들까지'이게 뭐야?','저건 뭐야?'하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늦게 도착한 탓에 주인 아주머니께 폐가 안 되나 했는데, 웬걸, 주인 아주머니께서 아이들을 부르신다. "얘들아, 너거 두부 만드는 거 봤나?" "와!" 하며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옹기종이 앉혀 놓고, 직접 그 자리에서 두부를 만드시고는 아이들 입에 한옹큼씩 집어 넣어주신다. 그뿐이 아니다. 언제 준비를 했는지, 아주머니는 쑥 물 들인 반죽, 치자 물 들인 반죽까지 내오셔서 송편을 만들 잔다. 밤이 늦었는데도 아이들은 신이 났다. 네 가족이나 모았으니, 애들 오글오글 대며 만드는 송편은 어느새 한 솥이다. 떡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녀석들이 자기가 만든 건 빨리 쪄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할 일이 많았다. 아침을 먹고는 바로 그 마을 안에 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옥산 서원'으로 갔다. 그 마을에서 이미 오랜 세월을 지내신 안내하시는 어른의 자세한 설명에 아이들의 발이 이끌려갔다.
서원을 한바퀴 다 돌고 나서는 독락당의 사랑채로 들어갔는데, 거기에 지게도 있고, 널도 있고, 떡메도 있었다. 언제 나오셨는지, 우리가 묵었던 집 주인 아주머니가 바쁘게 우리를 부른다. "와!" 아이들의 탄성에 따라가 봤더니, 떡판에 찹쌀로 지은 밥이 김을 무럭무럭 내며 산처럼 올라앉아 있다. 아이들은 너도나도 자기가 먼저라며 제 몸만한 떡메를 어깨에 둘러멘다. 아주머니의 재빠른 손놀림에 아이들은'으샤! 으샤!'를 외쳐가며, 몸을 비틀대면서도 떡을 친다. 서투른 아이들 솜씨에도 떡이 만들어져 고소한 콩고물로 버무려 놓으니까 이거야말로 기가 막힌 맛이다. 지나가던 외국인까지 불러서 같이 앉아 먹었다.
떡을 그만큼 치고도 아이들은 기운이 남아 널도 뛰고, 지게도 지고는 춤까지 춘다. 아이들의 흥에 어른들도 지치는 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는 버섯 농장도 들르고, 미나리 크는 것도 보았다.
매일매일을 바쁜 일상으로 살다 보니 한 틈의 여유를 맛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지난해 봄, 세심마을에서 아이들이 내뿜은 웃음소리는 충분히 1년을 살 힘을 주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 봄의 여유를 느끼며 우리 옛 삶을 그대로 느껴 볼 수 있는 곳이 그곳이 아닐까 한다.
-혜와 진의 아빠 최성곤(충북대 전기전자통신공학부 교수)
사진:세심마을 체험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송편만들기를 즐기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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