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요-경주 양지마을 할머니들

입력 2005-03-19 08:48:45

"명주짜는 거야 놀이지 뭐"

"우리가 무신 얘깃거리가 된다꼬 이래 찾아왔노? 그냥 명주나 짜고 사는데…. 하기사 60년 동안이나 명주 짰다카믄 그것도 말은 되것다.

"

사람 손 하나도 거치지 않고 양복 한 벌이 눈 깜빡할 사이 생산되는 이 시대까지도 '달그락, 탁! 달그락, 탁!' 소리를 내는 베틀로 명주를 짜는 할머니들의 한숨소리가 담장을 넘어나오는 곳, 경주시 양북면 두산리 양지마을. 워낙 명물이 돼버린 손명주를 생산하는 탓에 외지인들에게는 양지마을이라는 이름보다 '명주마을'로 더 유명한 곳이다.

모두 30가구 남짓한 이 마을에서 명주를 짜는 집은 절반이 넘는 18가구. 60, 70대 할머니가 대부분이고 할머니들 표현대로 '아직 이(齒)도 안생긴 핏덩어리' 취급을 받는 40, 50대가 서넛 포함돼 있다.

이들이 작년 한해 동안 짠 명주는 모두 250필가량.

"어제나 그제나 다름없이 오늘도 명주를 짜고 있다"는 최복출(74) 할머니는 "명주짜기는 배워서 하는 게 아니고 생활이고 습관"이라고 했다

최 할머니는 인근 양북면 봉길리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이미 고인이 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베틀을 배웠고 이 마을로 시집온 뒤로도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 베틀 앞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명주마을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손명주를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명주생산자 대표를 맡고 있는 이춘희(66)씨는 담담한 목소리로 "손 삼베 짜는 곳은 몇 있다고 들었는데 명주는 없다카데. 덕분에 몇년 전에는 베틀 들고 서울 경복궁 가서 명주짜는 거 시연도 했다 아이가"라며 자랑했다.

"두산리 명주가 왜 유명하냐?"는 물음에는 "별거 없어, 그냥 손명주는 우리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옛날에는 전국에서 다 명주 짰는데 우리라고 뭐 특별한 게 있겠나?"라며 오히려 반문했다.

하지만 이 마을 노인들이 명주에 가지는 애착은 대단하다.

이씨는 "애들은 손 놓으라고 야단이지만 찾는 이들이 있고 뽕밭과 누에가 있는데 그만둘 수는 없다"고 했다.

또 이런 생각은 지금 명주를 짜는 사람들 모두가 같다고도 했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현재 9천 평의 뽕밭이 있는데 올해 경작면적을 3천 평이나 더 늘렸다.

작년 20필의 명주를 짜 이 마을에서도 '생산왕'의 칭호를 얻은 김명자(75) 할머니. 김 할머니는 창고에 늘어놓은 누에를 돌보며 "뽕밭 관리하고 누에치는 게 전체 농사의 3분의 2이고 명주짜는 것은 놀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누에는 연간 두번 수확하는데 춘잠(5, 6월 수확)은 양이 많고, 하잠(8, 9월)은 윤이 잘 난다고들 하는데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실제로 짜는 우리 눈에는 똑같이 보인다"며 도시 소비자들의 섣부른 품평을 '턱없는 소리'라고 잘랐다.

김 할머니에게 명 짜면서 부르는 노래를 들려 달라고 했더니 "잠도 못자게 하면서 고된 일 시키는 시부모 욕도 하고 신세한탄도 하고 잠도 쫓고 하려고 그냥 말에 적당한 운율만 넣는 거지"라면서도 이내 "밤은 깊어 고요한데/내 신세는 와이렇노/서방님아 시부모야/나도 한번 쉬어보자/…."는 4·4조의 타령을 읊어 나갔다.

이 곳에서 생산된 명주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요즘 말로 인기 '짱'이다.

서울, 대구, 부산 등 대도시 디자이너들이 진짜 멋쟁이들의 옷을 주문받았다며 사러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수의용으로 팔려 나간다.

판로걱정은 없다.

하지만 이 일도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베틀이나 부속품을 만드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 최복출 할머니도 최근 960줄의 실가닥을 끼워 베를 짜는 기능을 하는, 참빗같이 생긴 베틀의 부속품 '바디'를 구하지 못해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충남 서천까지 가서 30만 원 가까운 돈을 주고 사왔다.

최 할머니는 "베틀로 명주 짜는 것을 배우는 젊은 사람들도 없지만 베틀제작 대(代)가 끊겨 손명주 대(代)도 끊길 판"이라고 걱정했다.

"지금처럼 우리 할망구들끼리 하면 앞으로 몇해나 더 하겠노? 젊은 사람들이 이어가면 좋겠는데…. 하기야 돈만 된다카믄 안 배우겠나. 우리 동네 명주 좋다고 선전 마이 해 주소."

이 마을 할머니들은 양북면 명주마을에서 손명주를 그만 두면 국산 손명주가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는 현실이 걱정이라면서 오늘도 베틀과 씨름하며 살고 있다.

경주·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사진: 올해로 명주짜기 60년째를 맞는 최복출 할머니의 솜씨는 직기보다도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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