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大邱도 大丘다

입력 2005-03-17 15:37:37

동대구IC로 가다가 있는 청기와주유소 남쪽방향으로 쭉 가서 무열대-대륜고-만촌우방타운으로 뻗치는 촌티나는 이름,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晩村洞)은 왜 만촌인가? 주변의 올망졸망 산들때문에 일조량이 적은 탓으로 벼농사가 딴 동네보다 더디다 해서 늦을'만(晩) 마을'촌(村)이다. 역사는 200년. 범물동(凡勿)은 울창한 뒷산에 범이 자주 출몰해서 범이 오지 말라는 뜻으로 말'물(勿)자를 썼다.

U대회 선수촌아파트 덕분에 촌티를 벗은 북구 동'서변동의 원래 이름 '무태'는 없을'무, 게으를'태 자(字)의 '無怠'다. 견훤의 군사를 맞은 태조 왕건이 부하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말라"고 독려한 것에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이웃 지묘(智妙)동은 왕건의 부하 신숭겸과 관련있다. 신 장군이 왕건과 옷을 바꿔입고 견훤과의 전투에서 대신 죽음으로써 왕건을 구했다는 그 '교묘한 지략'에서 따온 명칭이다. 공직생활 틈틈이 지명과 관련한 묻힌 얘기들을 소중히 챙겨 정년기념으로 남긴 하종성씨(대구시 상수도 사업본부 부장)의 책 '역사속의 달구벌을 찾아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들이다.

중구는 관청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공평(公平)동은 그곳(사립교원 연금매점)에 법원이 있어 법(法)은 공평하다는 데서 나왔고, 포정(布政)동은 경상감영이 있어 베풀'포(布) 정사(政事)'정을 쓴 것이다. 매일신문의 고정란 '야고부'밑에 있는 세토막짜리 촌평 '관풍루(觀風樓)'는 경상감영의 문루에 붙은 현판을 차용한 것으로, 감사께서 이 누에 올라 세속(世俗)을 살핀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광복이 60년을 맞고 왜인(倭人)들의 하는 짓거리가 더욱 가관이면서 일제치하 창지개명(創地改名), 즉 전국 곳곳 수백개의 땅이름까지 자기네 입맛대로 바꿔놓은 게 밝혀지고, 그 지명회복운동이 이제사 벌어지고 있음은 만시지탄이다.

속리산 천황봉(天皇峰), 문경 가은읍 왕릉리(旺陵里) 처럼 왕(王)자에다가 흰'백자(字)나 일(日)자를 덧붙여 일왕(日王)의 소유물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고 거북'구(龜)자 마을은 아홉'구(九)자 마을로, 달성 현풍(玄豊)의 풍년'풍은 바람'풍(風)으로 용심을 부려 놓은게 왜인들이다.

지금도 몇몇 지역에선 지명이 바꿔지고 있다. 세월과 삶의 변화 때문이다. 수성구의 황청(黃靑)동은 자칫 황천으로 착각 할 수 있어 황금동으로, 내환(內환)동은 '걱정거리( )'와 혼동돼 대흥(大興)동으로 바뀌었다. 달서구 파산동의 파(巴)는 '땅'의 뜻이 긴하나 삼성상용차 공장의 파산이후 더욱 기분이 상해져서 곧 호산(虎山)동으로 바뀐다. 주민동의는 끝났고 행자부 승인과 달서구 조례제정 절차만 남아있다. 인근 와룡(臥龍)산'청룡산에 용이 있으니 호랑이와 같이 놀게한 뜻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해당주민들의 청원에 따른 개명일뿐, 왜인들의 침략근성에서 나온 '창지개명'은 반드시 우리 식으로 "원위치"시켜놓아야할 식민 잔재다.

말을 바꾸어, 중국사람들이 드디어(?) 서울의 중국어 표기를 한성(漢城)에서 '서우얼(首爾)'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시가 서울 발음에 가장 가까운 '서우얼'로 중국어 표기를 바꾸기로 결정한 지난 1월, 중국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100년 넘게 불러온 이름을 사전 홍보도 없이 바꿔달라니 중국인들의 문화적 감각을 무시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다 방한 예정인 칭다오(靑島)시 측이 '서우얼'표기 의사를 밝히고, 주요 언론매체들의 동참이 늘어나면서 '서우얼'이 공식 인정을 받게될 전망이다. 하긴 우리도 이미 북경(北京)을 '베이징'으로, 사람 이름도 장쩌민, 후진타오, 원자바오로 불러주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 대구도 창지개명이 아닌 '지개명(地改名)'을 할 때가 됐다. 서울이 서우얼(首爾)이면 '대구(大邱)도 대구(大丘)다'. 대구의 원래 이름은 구(丘)자 오른편에 우부방(방)이 없다. 조선 영조때에 이(李)모라는 유생이 구(丘)자가 공자의 이름 구(丘)와 같아서 "함부로 부르기가 불경스럽다"며 바꾸자고 상소한 것이 발단이 돼 섞어쓰다가 1850년쯤, 정조대왕 때부터 '대구(大邱)'가 고착돼 버렸다는 것이 그 유래다. 丘와 邱가 둘다 '언덕'구'자 이기는 하나 그시대의 숭유(崇儒), 사대주의적 발상때문에 원음(原音)에 군더더기가 붙어있다면 이젠 떼어 버려도 좋지 않은가?

이유는 다르긴 하나 칠곡 왜관(倭館)도 변경 움직임이 없는게 이상하다. 1905년 낙동강변 돌밭(石田)이던 그곳에 철도가 놓이고 왜인들이 늘면서 신설 역간판을 '왜관'이라고 부른 것이 시초인데 이런 왜관 중에 이름이 여태 그대로인 것은 칠곡 왜관 뿐이라고 한다. 거긴 바꿀 맘 없는 것인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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