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텔레비전에 흘러 넘치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마다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하나 있다.
맛있는 음식의 요리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요리사가 '절대 비밀'을 고집하는 장면이다.
그 비밀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어림도 없다는 게 요리사들의 한결같은 주장이기도 하다.
'손맛'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옆에서 시중을 들면서 지켜봐야만 그 비법을 제대로 전수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유형의 지식을 가리켜 암묵지(暗默知)라고 한다.
'암묵'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정도로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식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암묵지는 도처에 널려 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암묵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묵지의 반대인 지식을 가리켜 명시지, 형식지, 또는 공식지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이다.
학교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전형이다.
이런 명시지에 관한 한 한국은 세계적인 지식 강국이다.
불타는 향학열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기부 문화가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거액의 기부 행위가 이뤄졌다 하면 대부분 학교로 몰린다.
배움에 대한 한(恨)을 갖고 있으며 여전히 그 한을 키우고 있는 한국인의 뜨거운 지식 사랑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한다.
반면 암묵지는 어떤가? 암묵지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암묵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
우선 정권 차원에서 살펴보자. 국정운영의 방법은 명시지가 아니라 암묵지다.
그 방법을 다룬 책이 있을 리 없다.
그건 인터넷에도 없다.
국정운영을 담당했던 사람들로부터 직접 전수받아야 할 지식이다.
적어도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건 꼭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정권들은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기에만 바쁘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불가피한 점도 있었을 것이나,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모든 걸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에만 몰두하느라 엄청난 사회비용과 기회비용을 유발하곤 한다
그 비용에 대해선 '과도기적 진통'이라는 편리한 변명이 늘 준비돼 있다.
행정부처 장관에서부터 공기업 사장에 이르기까지 '리더십 암묵지'는 어떠한가? 아예 없다.
그런 자리는 벼슬 자리로 통하기 때문에 나눠주고 즐기는 데에만 의미를 둘 뿐이다.
그간 수많은 장관과 사장들이 배출되었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암묵지의 공유를 위한 책 한 권 낸 적이 없다.
자서전이라고 해서 나온 걸 보면 거의 모두 자기 자랑 일색일 뿐이다.
앞으로 두고봐야겠지만, 허성관 행정자치부장관이 매일 '국정일지'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걸 나중에 책으로 낼 생각이라고 했는데, 이게 아마 최초의 리더십 암묵지 전수 행위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기업에선 사원들의 '안전의 욕구' 때문에 암묵지 공유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운동가는 내부비판을 했다는 핀잔을 들을까봐 시민운동의 암묵지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암묵지는 이런저런 이유로 사장되고 있는 것이다.
암묵지는 고상하지 않다.
지적 욕구나 허영심을 충족시켜주기엔 역부족이다.
서양 지식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자란 한국인들에게 암묵지를 지식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은 누추한데, 지식은 고상한 것만 추구하겠다면 어쩌자는 건가? 삶과 지식의 괴리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글로 쓰여진 암묵지엔 한계가 있지만 없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자꾸 연구하면 암묵지의 기록을 위한 좋은 방법이 나올 수도 있다.
사회적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
각종 공·민영지원사업과 학술진흥사업 등이 암묵지 개발·확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암묵지 제공자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행착오 비용을 줄여나가고 기존의 암묵지를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적어도 이런 수준의 '암묵지 혁명'이 일어나야 한국사회가 진정한 지식강국, 지식기반경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