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옛 城을 찾아서-(8.끝)프랑스 셰베르니 성

입력 2005-03-09 17:08:53

이 성의 역사는 13세기 무렵 필립 6세에 의해 귀족 작위가 내려진 유로 블레소아 가(家)부터 시작된다. 이 성은 블루아에서부터 시작하여 강의 상류를 따라 오르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블레소아의 젊은 아들인 자크 유로는 루이 11세, 찰스 8세, 루이 12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재정행정관으로서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1504년 이 성을 봉토로 받았다. 그의 아들은 루이 12세로부터 이 성을 요새로 증축할 것을 허락받은 뒤 그가 나폴리 전쟁에서 전사한 이후 그의 미망인이 그 성을 헨리 2세의 종교관에게 팔게 된다.

그 후 1565년 헨리 3세와 헨리 4세 시대 때의 충직한 재정행정관이었던 필립페 유로가 다시 소유주가 된 후 이 성에서 그의 아들의 불성실했던 아내가 자살로 죽었는데 당시 그녀는 죽음을 강요당했으며 관련된 시종관을 재판 없이 이 성에서 처형시킨 루머로 유명하다.

성의 증축과 아름다운 변신은 1625년경 시작되어 1634년에 끝났으며 성주였던 유로의 두 번째 부인 역시 성이 완성된 이듬해인 1635년 사망하였다.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는 성의 관리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으나 그의 아들은 군인으로서 이 성의 관리와 재정적 소비가 부담스러워 블레소아 장군에게 성을 판다.

이 후 이 성은 루이 15세의 외교사절이었던 뒤포르가 루이 15세의 허락을 받아 이 성과 주변의 땅을 모두 사게되어 셰베르니 백작 지위를 얻게 된다. 그 당시 성은 황폐해 1년에 한 방씩 보수하여 5년 동안 수리를 완성할 계획을 세웠으나 12년의 시간이 걸려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 이후 1825년 성의 소유는 다시 유로가로 넘어가게 된다. 그 후 19세기부터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게 됐다.

현재 이 성의 개 우리에는 약 70마리의 하운드종 사냥개가 있으며 예전에는 5천 마리가 사육됐고 여우 사냥용 말도 7천 마리나 길렀다. 기록에는 100만 명의 농민들이 사냥에 동원됐다고 하니 개와 말먹이를 위해 착취당한 백성들의 고통이 짐작된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성의 모습은 1724년 당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봉건 시대의 양식과는 많이 다르며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됐다. 이 성의 진정한 모습은 아파트형 방들을 방문하면 알 수 있다. 벽난로, 패널조명, 회벽의 천장 가구, 초상화 풍경화들은 모두 그 시대의 유명한 건축가, 조각가, 예술가들의 작품들로서 그 자체가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들이다. 라파엘이 그린 초상화, 므나르, 발랑세의 건축 등 아직까지도 그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각종 가구 등이 가득한 성안을 둘러보노라면 유로 문중의 역사 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 든다.

글: 김 정 길 본사명예주필

사진: 권 정 호 한국사진기자회 명예회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