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누리꾼 "내 홈피 놀러와"

입력 2005-03-08 11:21:43

대구 북구 노인복지관 컴퓨터 마니아들

은퇴한 노인들은 대부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많은 게 문제다. 그러나 최근 그 많은 시간을 활용해 만학의 기쁨을 만끽하는 노인들이 크게 늘고 있다. 조금씩 늘어가는 주름살을 쥐고 손자 손녀를 돌보며 뒷방에서 머물던 노인들이 '제2의 도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사회복지관 등에서도 한글부터 산수, 한문, 영어, 일어, 컴퓨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나이의 장벽을 넘어 젊은이들보다 더 뜨거운 향학열로 만학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현장을 찾아가봤다.

▨ 뜨거운 향학열

지난 23일 오후 2시30분 대구 북구에 있는 강북노인복지회관 컴퓨터실은 60대 이상 노인 컴퓨터 마니아들의 열기로 후끈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홈페이지 제작에 필요한 태그를 배워보겠습니다."

강사 정경화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불구경하듯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컴퓨터를 마주한다. 그 중에는 아직 용어가 생소해 강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받아쓰는 노인도 있고, 돋보기 안경을 고쳐 써 보는 노인들도 있다. 그러나 모른다고해도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다. 처음부터 다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고, 노력해서 안되는 일도 없다는 사실도 오랜 삶의 경륜에서 터득한 지혜.

그래서 머리에는 하얀 눈이 내려앉은 백발 노인이 됐지만 마음만은 젊은이 못지 않은 배움의 열정으로 꽉 차 있다. 대부분은 초급과정을 수료하고 고급 과정을 밟고 있는 노인들. 적어도 컴퓨터가 머리 아픈 기계라는 수준은 넘어섰다. 수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노인들은 컴퓨터 실력을 선보였다. 메모장에 '안녕하세요'라는 글을 띄우고 강사의 지시에 따라 명령어를 치니 가만히 있던 글씨가 좌우로, 또 위 아래로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허, 오늘도 하나 배웠네."

이들도 처음에는 컴퓨터에 선뜻 다가서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정보화니 디지털이니 하는 시대에 컴퓨터를 배우지 않고서는 세대 간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고 안방신세를 지며 쓸쓸한 노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노인 대학의 문을 두드렸고 어느샌가 컴퓨터 마니아가 돼 버렸다.

정경화 강사는 "실버 회원들의 향학열은 매우 뜨겁다"며 "꼭 배워야할 필요는 없지만 건강한 삶을 위해 배우는 것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학습효과도 높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도 노인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 배우는 것은 즐겁고 신나는 일

올해 여든살인 이형우 할아버지. 최고령인 그는 인터넷에 쏙 빠져 있다. "인터넷이란 세상에는 없는 게 없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고, 필요한 자료도 키보드만 두드리면 간단하게 찾을 수 있지." 그는 인터넷 예찬가가 됐다. 나이만큼 컴퓨터 실력도 최고다. 지난해에는 실버 인터넷 검색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할아버지가 컴퓨터 '도사'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평범한 노인들처럼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 '컴맹'이었다. "10년 전에 친구들이 컴퓨터를 배우러 가자고 했을 때, 콧방귀만 뀌었지." 늙은이가 배워서 뭐하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정작 컴퓨터를 접하면서, 또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서 삶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고 했다.

이 할아버지는 그 느낌을 '새로운 세상과의 대화'라고 표현했다. 이 할아버지는 요즘 외국의 아들 내외는 물론 손자들과 이메일로 안부를 전하기도 하고 '싸이 월드'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관리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김태암(68) 할아버지도 문서 작성에서 인터넷 검색, 채팅까지 컴퓨터로 못하는 게 없지만 처음엔 컴퓨터란 놈이 만만치 않았다. "나이가 드니 자꾸 까먹어요." 그래서 묻고, 또 묻고, 연습도 열심히 했다. 경로당을 서성거리던 김 할아버지가 컴퓨터 교실에 동참한 것은 2년이 좀 넘었다.

"처음 한 달이 제일 힘들다"며 "그 고비만 넘기면 컴퓨터가 재미있게 느껴지고 그 다음부터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집에서 컴퓨터만 보면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세월이 언제인가 싶게 지금은 집에서도 컴퓨터를 차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싸이 월드에 홈페이지를 만들었으니 한번 들어오슈"라며 말을 건넸다.

▨ 배움엔 끝이 없다.

박윤태(78) 할아버지는 월반을 한 탓에 진행되고 있는 수업이 쉽게 와닿지 않는 표정이었다. 흘러가는 세월에 실력이 준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기 위한 노력은 고3 학생 못지 않았다. 그의 노트에는 강사의 말 한 마디 놓치지 않고 빼곡히 기록돼 있다.

"나이 들었다고 안방에 앉아 뒷짐만 지고 있으면 뭘 해,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이 낫지." 그는 머리를 쓰니 치매도 안걸리고, 무엇보다 노력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삶의 활력을 준다고 했다. 박 할아버지는 이참에 조금 더 배워 인터넷 쇼핑과 인터넷 뱅킹도 해볼 참이다. "세상에 새로운 것을 아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어딨어."

이날 수업에 참가한 20여 명의 '신세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나이는 별 의미 없어 보였다.한 단계 한 단계 그렇게 배우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또 배우겠다고 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알아갈 때 느끼는 기쁨은 여생 동안 배움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낮잠이나 화투로 소일하는 것보다 배움을 선택, 노년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이들은 이제 컴퓨터를 익히고 활용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두성기자 dschoi@imaeil.com

사진 : '배우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 북구 지역 노인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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