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지붕을 타고 녹아 내리는
추녀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 원 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내리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박형진 '입춘단상'
한 방울, 두 방울, 겨울은 더디 가고, 천 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내어서, 한 방울, 두 방울이 아니라 갑자기 흘러내리는 물방울 소리를 내며 봄은 와서, 쏟아지는 햇살처럼 따뜻한 봄은 와서, 이제 춥지가 않아 움츠렸던 영혼도 기지개를 켜고, 돈 안 들여도 천지는 순식간에 꽃나팔을 불어 날릴 것이다.
천 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내어서, 청정하기까지 했던 그 얼음물에 발 담그고 피어나는 이 세상 사람의 꽃들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봄 햇살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껴안을 것이다.
박정남(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