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제' 김시열 前 본사 편집부국장 회고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독도의 날' 제정 추진으로 우리 국민의 반일감정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수교 60주년, '한일우정의 해'도 헛구호에 그칠 공산이다.
반세기 전 민간인 신분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목숨을 걸고 독도를 지킨 '독도수비대'가 다시금 그리워진다. 고(故) 홍순칠(洪淳七·1929~1986) 독도수비대장과 의형제를 맺고 교우했던 김시열(75·대구시 남구 이천동) 전 본사 편집부국장의 기억 속에 그들은 아직 열혈청년들로 남아 있다.
내가 홍순칠을 처음 만난 것은 1948년이었다. 당시 경북대 사범대에 재학중이던 나는 교사를 구하러 본토-울릉도민은 그렇게 불렀다-에 나온 울릉도 우산중학교 이용필 교장과 연락이 닿아 장우진 선생(당시 경북중 교사) 등 몇 명과 함께 영어교사로 입도(入島)하게 됐다. 내 나이 겨우 19세였지만 미 군정 경북학무국에는 24세라 속여 부임했다.
100m를 직선으로 그을 수 없는 손바닥 만한 운동장에 판잣집 같은 교실과는 달리 교직원 관사는 그런대로 쓸만했다.
하루는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내 또래의 토박이 청년이 관사로 찾아와 대뜸 "야! 너 술 할 줄 아나"하고 시비를 걸어왔다. 한창때이던 나도 "와! 술이야 잘하지. 한턱 내려고 하나" 했더니 다짜고짜 선술집으로 데리고 가 막걸리, 소주, 울릉도 특산물 머루주 할 것 없이 근 한 말을 둘이서 비우고 의형제를 맺었다. 그가 바로 홍순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일합방 전 섬에 들어온 울릉도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이따금 배를 타고 오는 왜인들을 죽창으로 내쫓기도 한 열혈인이었다. 또 홍순칠의 부친은 당시로는 드물게 경북중을 거쳐 일본 우에노 음악학원을 나온 음악가로 나의 동료교사였다.
나는 사범대 재학시 대구키네마(지금 한일극장)에서 '바보와 서생'이란 좌경 연극에 출연한 게 문제가 돼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돼 동료 한모씨와 본토를 일주일에 한 번 내왕하는 미제 LST(전차양륙함)에 숨어 섬을 빠져나왔다. 우리의 탈출을 뒤늦게 안 홍순칠은 옷을 입은 채 바다에 뛰어들어 멀리까지 배를 따라오다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갔다.
1950년 6·25가 터지자 나는 카투사로, 홍순칠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의 당번병으로 입대했다. 1953년 홍순칠은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직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논밭을 처분해 울릉도 출신 제대병 10여 명을 모아 '독도수비대'란 사설부대를 만들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니 절대 왜놈들이 얼씬 못하게 지켜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실천에 옮긴 것.1950년대 초 사비로 이들을 이끌고 독도에 상주하기 시작한 그는 큰나무를 베어 가짜 대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독도를 맴도는 왜선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던 당시 경북 경찰국장 김종원을 찾아가 기관총 1자루, 탄약, M1 소총 10여 자루와 집을 지을 판자를 얻어왔다. 의기양양하게 독도에 돌아온 홍순칠은 판자로 집을 짓고 지금의 '한국령(韓國領)'이란 글자를 동도 바위에 크게 새겼다.
하루는 대포가 가짜인 줄 안 왜선 한 척이 독도로 접근해왔다. 홍 대장은 주저없이 발사를 명했고 혼비백산한 왜선은 죽어라고 도망쳤다. 이 사건은 곧 외교문제가 됐다.
하지만 일본 측 항의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콧방귀를 뀌며 오히려 "애국청년들이 정말 장한 일을 했다"고 치하하고 훈장까지 줬다. 그후 독도에 눈을 돌린 정부는 1956년 경찰로 하여금 독도수비대를 정식으로 발족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사설 독도수비대는 무직이 됐다. 대원들을 보다 못한 홍순칠은 훈장을 전부 모아 삼베 보자기에 싸들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항의방문했다.
그들은 청와대 정문 앞에 훈장을 늘어놓고 "양철로 만든 훈장으로는 배고파 못살겠다"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들이 그대로 쫓겨났는지 얼마간의 보상을 받았는지는 홍순칠에게 듣지 못했다.
십수 년 전 이미 작고한 홍순칠 대장의 이야기를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늘어놓는 것은 역사책에도 실리지 못한 홍순칠의 업적을 기록으로나마 남기기 위해서이다. 간담 크고 위험한 짓을 도맡아 하던 홍순칠의 명복을 빈다.
김시열 전 본사 편집부국장 정리·이상헌기자 davai@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이재명, '선거법 2심' 재판부에 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