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킴 라일락(수수꽃다리), 잉거비비추(옥잠화), 구상나무, 나리….'
이 땅을 수백, 수천 년 동안 지켜왔지만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어느새 '국적'이 바뀐 우리 토종들이다.
우리 종(種)이 우수하다는 사례가 아니냐고 그냥 웃어 넘길까. 우리도 문익점 선생이 중국에서 면화를 '몰래' 가져 오지 않았느냐고 자위할까. 문제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종자전쟁이란 단어는 이제 우리 일상에도 깊숙이 파고들었다.
자칫 식탁 위 모든 음식이 수입종자로 채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성은 서두를수록 좋은 법. 우리 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는 농업인들이 있기에 희망은 있다.
■토종을 지켜라
세계 각국이 우수한 자국 종자의 해외유출을 막고 외국 종자 채집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은 식량안보와 직결돼 있다.
한 나라의 곡물 생산량을 좌우할 뛰어난 씨앗을 되레 외국에서 비싸게 사 와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0여 년째 토종종자에 매달리고 있는 오세석(52) 경북도 농산물원종장(原種場) 의성분장장의 노력은 우리 농업에 큰 힘이 되고 있다.
1984년부터 이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의 별명은 '백 바퀴'. 10만 평에 이르는 의성분장을 100바퀴는 돌았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지만 실제로 경북 구석구석, 그의 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가 지난 90년부터 지금껏 찾아낸 종자는 자주감자, 쥐눈이콩(서목태), 속청(서리태), 줄양대 등 200여 종이 넘는다.
농가에 보급 중인 35종 가운데 20종은 그가 이름 붙인 것이기도 하다.
검정벼를 찾아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까지 이어진 그의 정성 덕에 우리 토종들이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오씨는 "우리 토질에 맞게 적응한 토종 종자들은 생산량이 적다는 이유로 무관심 속에 잊혀가고 있다"며 "이런 게 아직 남아있었느냐는 말을 들을 때만큼 기쁜 일이 없다"고 말했다.
■한 우물만 파다
국내 종자시장 규모는 한해 4천600억 원 정도. 하지만 우리의 종자 주권(主權)은 위태롭기만 하다.
외환위기 이후 유수의 종묘회사 상당수가 외국에 넘어가 버린 것. 힘겨운 외국계 기업들과 싸움 속에서도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우수품종을 육성하고 있는 경신종묘(경북 의성군 의성읍)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값지다.
1948년 설립 이후 2대째 '종자' 한 우물만 판 이 회사는 채소종자 140여 품종을 보유하고 있다.
연간 생산량은 1천섬(100t). 육종연구소를 비롯해 호주·뉴질랜드·미국·이탈리아·덴마크·중국에 직영 채종포를 운영하고 있으며 해마다 3, 4종 정도의 신품종을 시장에 내놓고 있다.
박달무·황금노랑배추 등 무·배추 종자는 최고품질을 자랑하며 10년 전부터 일본·중국에도 수출하고 있다.
황해진(51·농학박사) 경신종묘 대표는 "어려움 속에서도 좋은 종자 보급으로 농가에 보탬이 되겠다는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며 "세계적인 종자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새로운 국가자원의 확보
종자산업의 부가가치는 엄청나다.
특히 재래종을 이용한 신물질 개발은 국가적 이익이 걸린 중대 사안이다.
하지만 우리는 식물자원이 빈약한 처지다.
남북한을 더해도 4천종밖에 되지 않아 중국의 10분의 일에도 못미친다.
그나마 토종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가가 조금씩이나마 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경제성을 쫓아 한 번 버리면 복원이 힘든 게 토종 농산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1988년부터 작목반을 조직, 줄양대 콩을 생산하고 있는 예천군 상리면 사곡리 한동수(50) 이장은 "어렵게 생산한 토종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와 정부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유통분야 지원이 뒷받침돼야 토종 곡물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인근 하리면에서 메밀을 심고 있는 권기섭(64)씨는 "예쁜 꽃이 피는 메밀이나 목화는 경관농업으로도 성장 전망이 밝다"며 "정부가 쌀뿐 아니라 잡곡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상헌기자 davai@imaeil.com
사진 : 의성군 단북면 성암리에 있는 경북도 농산물원종장 의성분장에는 경제성에 밀려 우리 곁에서 사라졌던 토종 종자 200여 종을 보관하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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