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서 강제징용 끌려간 정영수옹

입력 2005-02-28 13:32:17

'한국의 히로시마'恨푼다

"'고향이 어디인지 묻지 마라!'라는 말은 일제 강점하 히로시마(廣島)와 후쿠시마(福島) 등지에 강제노역으로 동원된 한국인 군속이나 노무자들 사이에서 유행어처럼 떠돌던 말이었지."

강제징용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정영수(87·경남 함안군 대산면 부목리)옹. 고향이 합천군 천덕면 가현리였던 정옹은 요즘 함께 끌려 갔다 유명을 달리한 피해자 후손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지난 1일부터 시작된 피해자 신고를 하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 지금까지 자신의 증언에 힘입어 합천에 사는 3명의 후손들이 합천군에 신고를 할 수 있었다.

지난 1942년 결혼과 함께 24세의 나이로 일본 후쿠시마 현 입석광산으로 끌려간 정옹은 그 뒤 히로시마 해군본부에서 훈련과 교육을 마치고 파푸아 누기니아섬 등에서 1년 반 동안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됐다.

비행장 건설에는 같은 마을의 차점열(77·사망)·노순상(78·사망)씨와 대양면 무곡리의 추연주(76·사망)씨도 동원됐다.

정옹 등 3명은 종전 무렵 900여 명과 함께 배를 타고 일본으로 오다 홍콩해협 부근에서 미군 잠수정 포격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져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노씨는 이때 목숨을 잃었다.

추씨는 10여년 전 세상을 떠나면서 붓으로 쓴 표창장과 빛 바랜 사진을 "나의 피와 같으니 버리지 마라"는 유언과 함께 장남 찬식(45)씨에게 남겼다.

정옹은 후쿠시마 탄광으로 함께 끌려 갔던 20여 명의 후손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정옹은 "히로시마와 후쿠시마 등지에서는 모인 사람들끼리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경상도·합천이라고 답했다"면서 "그래서 '고향이 어딘지 묻지를 마라'는 말이 유행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 증명하듯 합천군이 지난 1972년 원폭 피해자 조사를 벌였을 때 합천 출신이 5천77명으로 전국 최다를 기록,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려지기도 했다.

한편 합천군에 접수된 강제징용 피해 신고는 28일 현재 60여 건이며 서류를 가지고 간 주민들은 400여 명에 이른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