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24일 오늘로서, 정확히 2년하고도 6일이 지났다.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대구지하철 참사 말이다. 불과 2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인데도 벌써 까마득한 옛일로 여겨진다. 망각이 참으로 무서운 병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이 글은 중앙로역 참사 2주년에 맞춰 지난주에 올려야했다. 굳이 한 주를 늦춘 이유가 있다. 2주년 즈음에 많은 이들이 입을 열 것 같아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기대는 무산됐다. 정치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참석한 2주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부상자들과 유족들의 아픔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졌다. 신문과 방송은 중앙로역 참사의 근본 원인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중앙로역 참사는 또 그렇게 잊혀질 것이다. 성수대교 붕괴도 그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상인동 가스폭발 참사 역시 이미 잊혀진 지 오래다. 한국인의 고질병인 냄비 근성과 집단 치매증세가 다시 도진 것이다.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 나라가 들끓다가 이내 잊고 마는 '집단 알츠하이머병'을 고치는 약은 정녕 없는 것인가.
보리수염은 중앙로역 참사가 터진 다음 날인 2003년 2월19일 중앙로역 구내를 둘러보았다. 참혹했고 아수라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2월 27일자 주간지 '라이프 매일'에 '중앙로역을 기억하자'는 글을 올렸다. 마지막 부분만 다시 옮긴다.
"(전략)우리는 중앙로역 방화참사를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해양사고 때 부녀자와 어린이 우선 구조 전통을 세운 영국해군 수송선 '버큰헤이드호(號)'처럼 '중앙로역을 기억하라'는 재난대비와 예방 원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희생자 여러분을 가슴에 묻습니다."
1852년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이드호'는 병사들과 그 가족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로 항해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Km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 시간은 새벽 2시. 그 때 파도가 밀려와 배는 다시 바위에 부딪쳤다. 배 허리가 끊겼고, 사람들은 가까스로 배 꼬리(船尾)쪽으로 피신했다. 모두의 생명이 경각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구조선은 3척밖에 없었다. 1척 당 정원은 60명이어서 구조될 수 있는 사람은 180명이 고작이었다. 당시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30명으로, 130명이 부녀자였다. 반 토막이 난 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풍랑은 더욱 심해졌다. 승객들은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지만 이성을 지켰다.
사령관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라고 명령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은 갑판에 집합한 뒤 대열을 정돈하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 사이 부녀자들은 3척의 구명정으로 하선했다. 마지막 구명정이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병사들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구명정에 탄 부녀자들은 갑판 위에서 의연히 죽음을 맞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마침내 '버큰헤이드호'가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침몰하면서 병사들은 모두 물 속에 빠졌다. 얼마 후 몇 사람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용케 물 속에서 활대나 나무 판자를 잡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날 오후 구조선이 사고 해역에 도착해 살아남은 사람들을 구출했다. 그러나 이미 436명은 수장된 뒤였다.
사령관 세튼 대령도 죽었다. 세튼 대령은 구조선이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큼지막한 판자에 매달려 있었으나 선실 보이 두 사람이 가까이서 죽어가고 있자, 판자를 그들에게 밀어 주고 자진해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판자 하나로는 세 사람이 매달려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영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버큰헤이드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가 각지에 세워졌고 '여자와 어린이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생겼다. 이후 영국 국민들은 항해 중에 재난을 만나면 서로 상대방의 귀에 대고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고 속삭인다고 한다.
영국은 해양 참사를 겪은 뒤 '버큰헤이드 연습'과 '장례식 순서(연소자 우선)'라는 재난대처 원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연거푸 대형 재난을 겪고도 개선은커녕 제대로 된 백서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이웃 일본은 중앙로역 참사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다.
일본의 도쿄 소방청은 중앙로역 지하철 참사 후 지난해 3월 '지하철화재에 관한 검토위원회 보고서를 만들었다. 도쿄도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지하철 승강장 매점의 구조물까지 불연재(不燃材)로 바꾸는 등 지하철 안전기준을 대폭 강화한 조례안을 마련했다. 또 2년 전 조사팀을 대구로 파견했던 일본 국립소방연구소는 대구지하철 화재 당시 상황을 재현한 가상 체험시스템을 개발해 일본 국민들에게 지하철 화재 때 생존방법을 교육시킨다고 한다.
미국도 1986년 11월 28일 우주왕복선 첼린저 호가 발사대를 박차고 치솟은 순간 폭발하자, 윌리엄 로저스 전 국무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고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회는 로켓 연결 부분의 이음쇠가 느슨해져서 연료탱크와 충돌했다는 사고원인을 밝혀냈다. 그 후 미국의 우주 왕복선은 무사고 항진을 계속하고 있다.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나라와 국민은 희망이 없다. 우리는 재난이 끊임없이 반복되는데도 예방과 대비에 실패하고 있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년 여름 태풍이 닥칠 때마다 대책 없이 당하고도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실수와 실패를 개선하지 않고 잊는다면 중앙로역 참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중앙로역 참사를 잊지않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집단 알츠하이머병'을 고치지 않고선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아니라 20만 달러가 되더라도 영원히 후진국일 수밖에 없다.
조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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