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과거사 우선 조사대상으로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이 선정되자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우리 현대사의 왜곡된 그늘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 1974년 '긴급조치 4호' 발표 이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이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 1년 만에 여정남씨 등 8명을 형장의 이슬로 보낸 사건을 말한다. 사건 관련자 대부분이 대구·경북과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혁신계 인사들.
인혁당 사건 주동자로 지목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정남씨의 질녀 여상화(46·서울)씨는 현재 서울에서 몽양여운형선생 추모사업회에 몸담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삼촌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씨는 64년 6월 한일회담 반대를 주도한 혐의로 제적됐다 줄곧 유신반대운동을 벌였다. 이어 그는 "공교롭게도 진보 인사인 고 하재완씨의 아들 가정교사를 맡은 점을 교묘하게 악용, 인혁당 간첩사건을 조작하는 연결고리로 삼촌을 옭아맸다"고 주장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남편 도예종씨를 잃은 부인 신동숙(75·대구시 달서구 송현동)씨는 "74년 4월20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국가요원들에게 끌려간 남편이 1년 만인 75년 4월9일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다"며 한 많은 세월을 반추했다.
그는 "30년 동안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있는 모든 재산을 털어넣어가며 갖은 고생을 해왔다"며 "이렇게 고통받으며 반평생을 살아왔는데 국가가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8개월을 복역한 강창덕(77·전 매일신문기자·대구시 북구 동변동)씨.그는 74년 1월 '참소리'라는 제호의 지하신문을 비밀리에 발행, 밤마다 중앙통을 뛰어다니며 유신반대운동을 벌였고, '민주수호경북협의회'에 소속돼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5월 초 한밤중 집에서 연행된 강씨는 남대구경찰서(현 남부경찰서), 중앙정보부 등에 끌려다니며 악몽의 하룻밤을 맞아야 했다. 결국, 고문에 못 이겨 영문도 모른 채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진술서에 도장을 찍은 그는 이듬해 5월 초 대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8년이 지나서야 형집행정지로 대구교도소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출소 후 마땅한 생계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그는 통일·민주화운동을 계속하며 현재는 기초생활수급자로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나경일(75·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씨는 74년 5월 동구 신천동 집 대문 앞을 나서다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이 '강창덕, 이재문의 행방을 대라'고 윽박지르며 경찰봉으로 손바닥, 발바닥을 후려치고 물고문까지 하더군요." 당시 고문후유증으로 나씨는 현재 오른쪽 다리에 마비증세를 앓고 있다고 했다. 8년 8개월을 복역하고 82년 12월 출소 이후에도 24시간 감시를 받는 바람에 가까운 친척들조차 집에 접근하지 못했고 자녀들(1남3녀)은 '간첩 자식'이라며 손가락질당해야 했다.
나씨는 "인혁당 사건은 '북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는 식으로 완벽하게 조작됐으며, 인혁당 자체도 실체가 없다"며 "억울한 고인과 유가족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권성훈기자 cdro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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