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륜 파괴 범죄가 잇따르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비리·파렴치·위선 행각이 그칠 줄 모른다.
세상이 두렵다거나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오게도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이 의존하는 최대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바로 냉소주의다.
냉소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성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냉소주의는 한국인의 오랜 친구였다.
그것 없인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세월이 너무 길었다.
조선 말기엔 관리의 민중 수탈이 어찌나 심했던지 가난이 수탈의 유일한 보호막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일제강점기 하에선 다른 나라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민중이 공공기관과 엘리트 계층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을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극심한 내부 분열과 충돌로 점철된 해방정국에서 민생에 허덕이던 민중이 냉소 이외에 무엇으로 안전을 도모했으랴. 6·25 전쟁 중엔 정부가 서울시민을 속여가면서까지 도망가기에 바빴고 돌아와서는 피난을 못 간 이른바 '잔류파'를 처단하기에 바빴다.
좌우(左右)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그 이후 한 세대에 걸친 세월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긴 했지만 부패와 독재로 점철돼 민중의 냉소주의를 고착화시켰다.
냉소주의는 늘 최악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였다.
공적 영역엔 불신을 보내되, 사적 영역에선 신뢰할 수 있는 연고를 키우고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거는 처세술이었다.
냉소의 사전엔 실망과 좌절이 없다.
배신을 당할 일도 없고 상처를 입을 염려도 없다.
한국인은 냉소주의를 사랑하지만 냉소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의 가슴 한구석엔 뜨거운 정열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를 보자. 한국인은 정치를 저주하는 동시에 숭배한다.
만약 한국인들이 정치를 저주하기만 한다면 사회 각 분야에서 명성을 쌓은 사람들이 선거 때만 되면 줄줄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최근의 기아자동차 채용 비리 사건이 잘 말해주듯이, 한국은 줄 없인 살기 어려운 나라다.
목에 줄이 감겨 죽을망정 줄을 팔고 줄을 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한국인이다.
한국인에게 정치는 '줄의 예술'로 간주된다.
줄은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그건 개혁의 무풍지대에 놓여 있다.
아니 개혁을 위해서라도 개혁파의 줄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파의 신념이다.
그걸 '코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중간에 코드를 바꾼 사람들을 가려낼 만큼 엄격하거나 옹졸하진 않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목숨 걸고 줄서기에 나서는 것이다.
줄을 서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줄이 저주의 대상인가, 숭배의 대상인가? 숭배의 대상이다! 줄은 놀라운 신통력을 발휘한다.
거의 다 죽은 목숨을 살려내기도 하고, 찬란한 '코리언 드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게 바로 정치의 마력이다.
그 마력의 축복을 받았거나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론 '교과서'에 충실하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외친다.
나도 잘 되고 나라도 잘 되게 하는 공존공영의 원리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 걸쳐 그런 원리는 깨지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위선의 미덕을 역설했다.
위선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다 해도 위선은 위선이 표방하는 가치들을 옹호해주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민중의 도덕적 타락이 극심했던 16세기의 이탈리아에선 위선의 효용이 컸으리라는 것에 동의하긴 어렵지 않다.
그러나 21세기의 한국에선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공적 냉소,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는 자본주의 경쟁의 장점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무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삶을 너무 피곤하고 각박하게 만들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빈부의 양극화는 그 한계점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언어의 인플레이션이 만연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냉소의 벽을 깨기 위해 책임지기 어려운 말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망정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일 수 있다.
냉소의 벽을 더욱 두텁게 만들기 때문이다.
냉소를 오만하게 깨려 들지 말고 겸허하게 껴안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다.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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