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여행-서편제의 '청산도'
겨울 한가운데서 봄을 느낄 수는 없을까. 봄이 꿈꾸는 반란이 궁금해 남쪽으로 향했다. 완도가 품은 섬, 청산도에는 이미 반란이 시작됐다. 비닐을 뚫고 나온 마늘과 한 뼘이나 자란 보리들은 벌써 제 색깔을 내기 바쁘다. '청산'이란 이름 그대로 들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다.
영화 '서편제'의 무대였던 당리마을 돌담길에서도 겨울은 벌써 떠날 채비를 끝낸 상태. 돌담 안쪽의 보리밭은 멀리 발아래 보이는 도락리 포구의 쪽빛바다와 한창 색깔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4월쯤 한창 꽃을 피울 유채와 마늘밭도 봄의 반란에 동참한다. 칙칙하던 돌담길이 돋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다. 깔끔한 풍경이다.
돌담길을 걸어본다. 등짐을 맨 소리꾼 유봉과 치마저고리 차림의 의붓딸 송화가 덩실거리며 진도아리랑을 주고받은 길이다. 의붓아들 동호가 북채로 흥을 돋우며 내려오던 길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진도아리랑을 흥얼거리다 보면 풍경은 사라지고 황톳길만 눈에 가득하다. 그 길을 따라 조금씩 흥을 더하며 내려오는 영화 주인공들이 보이는 듯하다. 임권택 감독은 왜 이 황톳길을 배경삼아 소리를 들려줬을까. 땅위의 돌담길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게다. 돌담길처럼 굽이는 있으되 북에도, 소리에도 나름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그래서 이야기한다. "북을 치는 것에도 밀고 달고 맺고 푸는 길이 있다"고. 인생이라고 맺고 푸는 길이 없으랴.
영화에 담긴 한과 구슬픈 내용을 잊어버리기엔 이곳에서 보는 일몰이 안성맞춤이다. 뉘엿뉘엿. 도락리 포구 쪽으로 해가 드리워지면 바다도, 섬도, 하늘도 붉다. 그러나 색은 시시각각 변한다. 강렬하던 붉은 색도 곧 은은해지고 어느새 오렌지색이었다가 푸른빛이 돌기도 한다. 포구의 수백년된 노송이 실루엣으로 변할 때쯤에야 감탄사를 토해낸다. 서편제에서 돌담길을 내려오는 장면을 5분40초동안 하나의 컷으로만 촬영했듯 일몰의 여운도 하나의 컷으로 오랫동안 남는다.
글·사진 박운석기자 stoneax@imaeil.com
사진: 서편제에서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주고받으며 걸어 내려오던 황톳길 돌담. 이곳도 개발의 바람을 비껴가지 못한 듯 원래모습을 많이 잃었다.
※매일신문 홈페이지(www.imaeil.com) 기자클럽 '박운석의 콕찍어 떠나기'를 클릭하시면 '섬여행-서편제의 무대 청산도'에 관한 좀더 상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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