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고흐와 칠칠(七七)

입력 2005-02-01 08:43:19

후기 인상파의 대가이면서 이글거리는 화풍을 떠오르게 하는 빈센트 반 고흐는 대표적인 기인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늘 가난 속에 살면서 괴팍한 성질을 소유한 자였다.

그가 고갱과 함께 살면서 자주 다투는 가운데 자신의 귀를 자른 일화는 유명하다.

고흐는 자신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고 고갱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봐달라고 했지만 늘 핀잔만 받았다.

한 번은 귀가 잘못 그려졌다는 말에 다시 고쳐 그려서 고갱에게 보여주었지만 역시 귀가 잘못되었다고 놀려 그만 귀를 잘라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흐보다 훨씬 더한 기인화가가 있었다.

조선후기에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과 교유하면서 "최산수(崔山水)"로 불린 직업산수화가 최북(崔北)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괴팍하고 자유분방한 성격과 기이한 행동, 심한 주벽으로 유명했다.

한번은 금강산 구룡폭포의 절경에 심취하여 "더 이상 그릴 것이 없다"는 말을 남긴 뒤 폭포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또 싫어하는 어떤 고관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자꾸 조르자 그만 자신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을 실명하고는 "제가 싫어서 그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이 눈이 그림을 못 그리게 한다.

내 몸에 다른 사람이 손을 대기 전에 내가 먼저 댄다!"는 말을 남기고는 함흥차사가 되어 버렸다.

그 후 최북은 한쪽 눈에만 안경을 걸친 채 그림을 그렸다.

이처럼 그는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굴욕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택하는 지존의 화가였다.

그의 호생관(毫生館)이라는 호는 '붓으로 먹고 산다'는 뜻이며 이름의 북(北)자를 좌우로 잘라 칠칠(七七)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어쩌면 스스로 칠칠맞지 못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예술관을 꿋꿋이 지켜나가려는 동서고금의 화가들의 기행은 오늘날 작가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화가·미술사학 박사 황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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