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부, 사람이 해서는 안 될 거의 모든 것

입력 2005-01-28 11:06:58

하르트무트 크라프트 지음/열대림 펴냄

어릴 적 밤에 손톱과 발톱을 깎다가 부모님께 혼이 난 적이 있을 것이다. 시골 할아버지댁에 놀러가 문지방을 베개 삼아 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왜 낮에만 손'발톱을 깎아야 하고, 문지방을 베고 누우면 안 되는 것일까? 또 시험 보러 가는 날에는 왜 미역국을 먹으면 안 될까? 실정법이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우리 주위에는 수없이 존재한다. 흔히 '미신적인 믿음'으로 애써 깎아내리기도 하나 왠지 하고 나면 꺼림칙한 것들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의 저명한 신경치료 전문의이면서 심리교육 분석가인 하르트무트 크라프트가 쓴 '터부, 사람이 해서는 안 될 거의 모든 것'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터부(불법은 아니지만 금기시되는 것)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다양한 사회공동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등 터부의 신비한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책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터부와 금기의 규칙들이 소개돼 있다. 미국에서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검둥이'(Nigger)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망언으로 낙인찍힌다. 독일의 경우 유대인을 비하하는 '유댄자우'(Judensau'유대인과 암퇘지의 합성어)를 쓸 경우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또 유럽 문화권에서 신혼 첫날 신랑이 신부를 번쩍 안아서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가 문지방을 밟아서 안 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저자의 설명은 흥미롭다. 과학적인 사고를 내세우는 서양에서도 무시하지 못하는 터부는 어디에서 처음 시작됐을까.

저자는 아담과 이브를 인류 최초의 터부 침범자들로 규정한다. 금지된 과일인 선악과를 따먹는 대가로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혹독한 벌을 받게 됐다는 것. 지은이는 여기서 터부가 우리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는 지에 대한 해석까지 동시에 제시한다. 터부는 집단을 유지시켜 정체성을 보호하며, 터부 깨기 혹은 터부 침범을 통해 집단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 이를 테면 아담과 이브가 터부를 침범함으로써 순진무구한 '동물'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으로 발전했다는 식이다. 얼마 전 넬슨 만델라가 아들의 에이즈 사망 사실을 고백하면서 아프리카의 에이즈 터부를 깬 것이나,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이슬람 사회의 터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도 '여자가 배를 타면 불길하다'는 오랜 터부를 깨고 여성 해군을 모집하는 등의 건설적인 변화는 저자의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싣는다.

책을 덮으면서 그동안 나 자신을 구속했던 터부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 책의 저자가 묻고 권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터부를 깨면서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해봄은 어떨까. 336쪽, 1만6천500원.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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