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빤지나 종이·비단 등에 글씨나 그림을 그려 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를 '현판(懸板)'이라 한다.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붙여서 건물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주는 횡액이 일반적인 형태다. 중국 진(秦)나라 때 건물 명칭을 표시한 서서(署書)가 효시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 조선시대엔 사찰 건물은 물론 도성과 문루, 궁궐 전각, 지방관아, 향교'서원'일반주택에까지 붙여졌다. 이같이 건물의 멋을 내면서 명칭과 내력, 역사와 인물 등을 담은 자료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들을 바꾸거나 바꾸려고 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문화재청은 정조(正祖)의 초상화를 모신 수원 화령전 '운한각(雲漢閣)' 현판을 지난 24일 다른 글씨로 이미 바꿔버렸다. '광화문' 한글 현판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한 한자로 바꿔 광복절에 교체하는 방법도 검토되는 모양이다. 이 문제를 싸고 찬'반 여론이 증폭되는 까닭은 '왜'일까.
◇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당연히 교체해야 한다'는 입장과 '비판도 하고 반성도 해야겠지만 역사 자료는 남겨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지난해 노 대통령을 만나 정조대왕과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지만, 어떤 '정치적 저의'와 연계된 움직임이라면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기 때문이다.
◇ 새해 들어 한'일협정 문서와 문세광 저격사건 관련 문서 등이 잇따라 공개되면서 '박정희 때리기'라는 정치적 저의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돼 온 터다. 그 뿐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영화 '그때 그 사람'에 이어 인혁당 사건, 언론 통폐합,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만들어지고 있다니 문화계가 '권력과의 거리 좁히기' 행보는 아닐는지 아리송해질 수밖에 없다.
◇ 이젠 다른 대통령들의 친필 휘호들까지도 함께 도마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현판에 쓴 글씨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계가 앞장서서 전 대통령을 폄훼하려 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면서 과거 중국 '문화 혁명'을 떠올리는 사람도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까지는 생각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과거 흔적 지우기를 성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태수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