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舊) 을사오적, 신(新) 을사오적

입력 2005-01-20 16:08:52

1991년 광복 46주년 8.15특집 취재를 위해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 전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보름간이라는 촉박한 일정에다 갑자기 취재지시가 내려와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취재에 나서 고생한 기억이 새롭다. 더욱이 여름 휴가기간이어서 미리 약속한 취재원마저 휴가를 떠나버리는 바람에 밤잠까지 설쳐야 했다. 당시 강제 징용과 종군위안부(당시는 '정신대'로 불렀음) 취재에 나섰으나 종군위안부 취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노예 노동'에 투입된 강제 징용자들의 흔적만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지하 비밀 군수공장과 탄광 등 노역장에 동원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굶주림 속에서 하루 14시간 이상 일해야 했고 작업이 늦어질 경우 '특고(特高)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이 뒤따랐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징용자들이 숨졌고, 일본 전역의 사찰에 무연고 유골로 남아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는 상태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에 따르면 종전 후 일본 정부가 우리측에 송환한 한국인 희생자는 전체 희생자의 10%에도 못 미치고 유해조차 찾지 못한 유가족이 90%를 넘는다. 특히 오키나와에선 미군 상륙작전 때 일본군에 의한 총살과 미군 폭격으로 1만 명의 징용자들이 희생됐다.

당시 기사 중 일부만 보자. "재일동포 학자들과 일본인 전문가들은 일제의 조선인 강제 징용자 수를 151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제의 '노무동원계획'에 따라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강제 연행된 사람을 일본 후생성은 66만여 명, 대장성은 72만여 명으로 밝히고 있다. 홋카이도에서만 최저 12만 명에서 최고 2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광산, 비행장, 댐·도로·항만 등 200여 곳의 노역장에서 '노예 노동'에 내몰렸다.

이러한 사실도 재일 한국인들과 진보적 일본지식인들의 노력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 연행자의 현황 공개를 여전히 은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골 발굴작업도 회유와 협박으로 방해하고 있다.…(중략)…삿포로 시내에서 자동차로 30여분 거리인 홋카이도 개척기념관을 찾았다. 지하 문서보관창고에 처박혀 있는 조선인 강제연행과 관련한 기록의 열람과 복사를 요청했으나 기념관 학예부 자료과 주임은 거절했다. 네 상자 분량의 자료 보관 상태를 촬영하려고 했으나 이마저 거부하고 취재팀을 몰아내며 화를 냈다.

(중략)삿포르에서 만난 당시 유바리 탄광 광부 이병천 옹은 하루 탄차 500대 분을 채탄하지 못하면 밤이 되어도 막장에서 나올 수 없었으며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김자등 옹도 '왜놈 간부'들은 조선사람들을 개처럼 취급했다면서 작업이 부진하면 곡괭이로 머리·다리 가리지 않고 마구 때려 피를 흘리면서도 일해야 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 취재한 내용이 신문에 연재되자, 적잖은 징용자와 그 후손들이 찾아왔다. 보상받을 길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어떤 이는 일제가 발급한 '군표'(일본정부가 발행한 유가증권)까지 챙겨와 보상 가능성을 물었다. 속시원한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고 답답하기는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들을 만나면서 일제가 40년 간 수탈한 우리 민족의 생명과 재산을 3억 달러란 헐값에 넘긴 1965년 한일협정의 주역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매국노'가 따로 있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17일 정부가 한일협정의 실상을 밝히는 문서를 일부 공개해 온 나라가 시끄럽다. 광복 60주년을 맞았지만 한일 과거사 청산이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한일협정의 내용은 기실 새로운 게 별로 없다. 그동안 학계의 연구와 언론의 보도로 알려진 내용이 대부분이다. 단지 정부 공식문서가 공개돼 일제 치하에서 강제 연행된 징병·징용자와 종군위안부에 대한 실질적 보상책임이 우리 정부에 있고 일본 정부도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일본측으로부터 청구권 자금 성격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8억 달러를 받아 지난 1970년대에 징용 사망자 8천522명에 대해 사망자 1인당 그 유족에게 30만원씩 지급했다. 일본정부가 발행한 유가증권에 대해서도 약 9천700여건에 1엔 당 30원씩으로 환산해 지급, 총 91억8천769만3천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개인보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박 정권은 당시 보상 사실을 '의도적으로' 홍보하지 않아 보상금을 받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다.

박 정권은 한일청구권 협상을 민사적 채권채무를 청산하는 형식으로 진행해 결국 일본측 주장대로 '경제협력 자금' 명목으로 8억 달러를 받았다. 민족의 자존심을 헐값에 팔아 넘겼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박 정권은 당시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포함한 회담 진행과정을 비밀로 했고 '6.3사태'라는 격렬한 반대시위를 초래했다. '굴욕회담'과 '구걸외교'를 규탄하는 데모가 격화되자, 1965년 위수령과 계엄령을 발동해 겨우 한일협정에 서명했다. 반면 일본은 필리핀을 3년 간 점령하고서도 무상 6억 달러를 배상하고 국교를 재개했다. 온갖 살육과 약탈을 당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한 우리의 경우 일제 강점기간이 40년(한일합방 시점부터는 36년)인 점을 감안할 때 단순 계산해도 최소 72억 달러 이상을 보상받아야 했다.

보상금액만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아직도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조약 및 이후의 한반도 식민통치를 합법이었다고 강변한다. 한일협정이 한일합방조약이 원천무효임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협정이 40년간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에 공식적인 면죄부를 쥐어준 꼴이다. 한일협정은 또 독도와 종군위안부 및 사할린동포 문제,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법적 지위 보장 등 여러 현안들을 양보해 숙제로 남겨놓았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법화해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대부분 포기한 것이다. 따라서 한일협정은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보호조약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이 이처럼 '민족적 굴욕'을 감수하며 '구걸 회담'을 성사시킨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 5.16군사 쿠데타로 박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일본과의 수교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국은 독도 문제가 한일회담의 걸림돌이 되자, 박 정권에 독도를 포기하라는 압력까지 넣었다. 당시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구 소련·중국(중공)에 대항한 '반공 전선'을 구축하는 전략을 추진 중이어서 한일 국교정상화가 절실한 입장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박 정권이 한일협정을 졸속으로 체결한 이유가 불충분하다. 지난해 KBS '일요스페셜'이 보도한 민족문제연구소 보고에 따르면 1965년 한일협정 때 박 정권이 일본측으로부터 6천600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한국에 불리한 한일협정을 체결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는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961년부터 1965년 사이 약 4년간 일본의 6개 재벌로부터 6천6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았고 이는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당시 6천600만 달러는 요즘 화폐가치로 따지면 몇 백억 달러와 맞먹는다.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굴욕적 한일협정을 체결한 게 아니라 뇌물을 먹고 '매국 외교'를 한 것이다.

정부의 한일협정 문서 공개와 관련, 일부에선 '경제의 신(神)' 박정희를 깎아 내리려는 음모라며 음모설을 제기한다. '박정희교 신도'들은 이번 한일협정 문서공개로 드러난 박 정권의 치부가 분명 달갑지 않을 것이다. 또 그의 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대권가도'에도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또 대일 청구권 자금이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우리 경제재건에 쓰였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이는 무상원조 3억 달러가 한국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되었다는 일본의 주장과 일치한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아니다. 4.19혁명이후 들어선 당시 민주당 정부는 국민들의 경제개발 요구에 따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5.16 주동자들은 민주당 정권의 부흥부를 접수하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발견하고 정권 찬탈시비를 만회하기 경제개발에 나섰다. 이때 종잣돈은 민주당 정권이 계획한대로 내자와 세계 각국 차관으로 마련되었다. 당시 각국의 차관 규모는 500억 달러에 달했다. 따라서 한일협정 체결로 일본이 주기로 한 무상 3억 달러를 포함한 8억 달러는 시쳇말로 '새 발의 피(鳥足之血)'에 불과했다. 그것도 바로 현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10년에 걸쳐 물자로 들어왔다. 일본이 준 것은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대일 종속화라는 '원하지 않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외교권이 박탈돼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된 1905년은 을사년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한일회담이 체결된 1965년도 을사년이다. 올해는 광복 60주년이면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한일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속 좁은 섬나라' 일본의 책임도 크지만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 이승만 정권이래 박정희 정권까지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친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산은커녕 이제는 단죄돼야 할 세력이 우리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친일 세력 당사자는 이미 대부분 이승을 떠났으나 그 후손들이 '친일 선조'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친일파 후손들이 선조들이 일제로부터 하사받은 땅을 되찾겠다고 나서는 지경이다. 하지만 이젠 이들을 단죄할 세력조차 없다. 일제에 저항한 이들 역시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그 후손들은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이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앞장 선 '을사 오적'은 이완용·박제순·권중현·이지용·이근택이다. 이들은 이미 '매국노'란 낙인이 찍혀 있다.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조약을 원천 무효화하지 않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주역은 박정희·김종필 등이다. 이승을 하직한 사람도 있고 살아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신(新) 을사 오적'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어야 한일과거사는 청산될 것이다.

조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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