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 뒤 1919년 1월 18일 각국의 대표들이 파리에 모여 전후문제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를 열었다. 전승국 32개국이 참가했지만, 실제 전승국 전체회의는 몇 번 열리지도 않은 채 전쟁 승리의 주역국인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의 5개국 대표로 구성된 최고회의에서 중요한 사항들이 결정됐다.
이 중에서도 일본은 유럽과 주요 관계가 없었던 까닭으로 배제되고, 이탈리아는 퓨우메 문제로 합의에 도달할 수 없어 스스로 철수했다. 결국 파리강화회의의 주도권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에게 돌아갔다.
이 회담에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 평화 원칙'이나 로이드 조지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세계 곳곳의 식민지 국가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차 대전 이후 민주주의 이념 실천을 위한 자리였음에도 각국의 현실적인 문제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회담의 성격은 패전국에 대한 전승국의 보복으로 변질됐다.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영토가 줄고, 대다수의 식민지들을 잃었으며, 막대한 배상금(1천320억 마르크)을 지불해야 했다. 군비 보유도 엄격히 제한됐다.
프랑스는 이 회담을 강경책으로 이끌어 유럽 내 강대국 독일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1871년 독일제국(제2제국) 수립 ▲1954년 정부, 독도에 한국영토 표지 설치 ▲1994년 문익환 목사 타계 ▲2001년 한'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안 공식 서명.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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