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난 해 12월, 수능 성적이 발표되던 날이었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이 유달리 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모 여고 3학년 어느 교실에서 수능 성적표를 교부받는 모습을 담은 스냅 사진이었다. 한눈에도 교실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전면을 향해 단정히 앉아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사뭇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교실이나 주눅 든 학생들의 안쓰러운 모습이 아니라 그 교실의 터줏대감처럼 창문에 단호하게 붙어 있는 다음의 문장이었다.
―우린 재수 없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교실 분위기에 휩싸인 학생들의 표정과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슬픈 전설 같은 비장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그때 마침 밤하늘은 별도 보이지 않는 먹빛 어둠에 얼어 있었는데, 나는 그 밤하늘을 바라보며 4년 전에 끊은 담배라도 피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아시아 게임이 열리던 해에 태어난 그들은 정말 재수가 없는 세대인지도 모른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듯 '처음'이란 늘 시행착오와 약간의 위험과 희생이 따르는 법인데, 하필 그들 앞에 매정스레 금줄이 쳐져 어쩔 수 없이 '처음'의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얼떨결에 친 수능이 옛날과 달라 정작 시험을 쳐 놓고도 요지경 속 같아서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너도 찜찜하고 나도 찜찜하고, 끝내는 너도 헛갈리고 나도 헛갈려 마치 벌건 고추장에 김장 배추를 버무려 놓은 것 같은 생게망게한 것이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모름지기 신의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시험이란 뒷맛이 깔끔해야 하고 결과는 잘 익은 석류알처럼 투명해야 하는 법인데…, 아무튼 참 재수 없긴 없다.
다음날 수업 시간에 내가 무슨 말끝에 그 얘기를 해 주었더니 아이들은 까르르 깔깔 웃는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어떤 학생은 내 오독을 친절히 교정해 주고는 으스대듯 양손에 브이 자를 그려 보이기도 한다. 백 번 지당한 말이다. 어느 못난이가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가슴팍에 보란 듯이 붙이고 다니겠는가.
아마도 고3 학생들이 싫어하는 말들 중의 하나는 '재수'일 것이다. 그들을 지도하다 보면 출입문 유리창에 '문 안 닫으면 재수한다.'는 글귀가 아포리즘처럼 붙어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재수의 길이 그만큼 험난하고 끔찍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십중팔구 그들도 그런 각오로 써 붙였을 것이다. 우리는 재수하지 않고 제때 대학에 들어가겠노라고. 아니, 우리 모두 일구월심 면학에 힘써 어떤 일이 있어도 재수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에 붙겠노라고. 그 글귀 속에는 여고생다운 애교스러움과 기특함마저 풍겨 나온다. 그럼에도 내 눈에는 자꾸 재수(再修)가 재수(財數)로 굴절되어 비치는 것은 웬 까닭일까.
며칠 전에 나는 한 동향인을 만났다. 시장 바닥에서 고기 장사를 하는 그는 주기가 오르자 참으로 모진 말을 했다. 요즘 입시가 꼭 우리같이 무식한 놈들은 감히 생심 낼 엄두를 못 내도록 일부러 확 뒤섞어 놓은 것 같다고. 그러면서 그는 이번 수능에서 불거진 종기가 좀더 팍팍 곪아터지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래야만 높으신 양반들이 정신이 버쩍 들어 연고 대신 메스를 들이댈 것이 아니냐고, 그는 마불린이 서리꽃처럼 내려앉은 등심보다 더 붉은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나는 뒤늦게 그에게 올해 고3이 되는 딸애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끄럽게도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머잖아 따스한 봄볕과 함께 어김없이 신학기가 찾아온다. 올해 고3이 되는 학생들은 신학기를 맞이하는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 고3 교실에는 또 이런 당돌한 문구가 붙을지도 모른다.
―우린 진짜 재수 없다.
올 연말에는 그들의 당찬 소망이 모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난 수능에서 드러난 각종 문제점들을 철저히 보완해 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본다.
이연주 소설가'정화여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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