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가수 길은정, 끝내 숨져

입력 2005-01-08 08:20:08

"정직한 낭만주의자로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평생 소녀같던 가수이자 방송인 길은정씨가 7일 오후 7시 30분께 분당 자택에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길씨는 지난 11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자신을 그렇게 기억해 달라고 했다.

"은근슬쩍 넘어가기도 하고 눈을 질끈 감아 주기도 해야 하는 데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았어요. 저같은 사람이 살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었어요"라고 말하던 그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는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가수로 데뷔해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MC와 DJ

등 방송인으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뽀뽀뽀'를 비롯해 '가요톱텐, '영일레븐', 'TV쇼 네트워크', EBS '만들어 볼까

요', MBC FM '정오의 희망곡' 등 1980년대와 90년대의 대표 MC로서 웬만한 인기 프

로그램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과 이별하기 전날까지 이를 악물어가며 생방송을 한 원음

방송의 '노래하나 추억둘'이 가장 각별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함께 하게 됐다.

생명이 사그러가던 중에도 분당에서 직접 운전까지 해 가면서 흑석동의 원음방

송으로 출퇴근하면서 매일 방송진행을 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가장 사랑하는 방송이죠.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거든요. 남들 알아주는 큰 방

송사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청취자들께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거든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

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라던 그였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KBS '열린 음악회' 무대에서 쓰러지면서도 투혼을 발휘

해 노래를 들려줘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1996년 직장암과 투병을 시작했던 길은정은 2002년 노래 시집을 낼 때만 해도

임파선으로만 전이가 되어서 잘만 관리하면 10-20년까지도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

다고 했다. 최근에는 림프와 혈류를 통해 암세포가 골반과 척추에 완전히 침투해 오

른쪽 다리를 전혀 쓰지 못했다.

그는 지난 2002년 가을부터 전 남편 편승엽과 이른바 사기결혼과 관련된 명예훼

손 등을 놓고 법적 분쟁을 겪으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그는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징역 7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길씨

는 항소했으나 이후 항소를 취하해 모든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는 "이제 와서 이것을 보상 받을 수는 없겠지만요. 남은 한달이든 두달이든

알차게 쓸 겁니다. 이젠 원하는 것을 생이 끝나기 전에 원없이 다 해야겠다는 생각

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가수와 진행자로서 뿐만 아니라 에세이집 '그럼에도 행복하다'와 노래 시

집, 귀로듣는 책(오디오북) 등의 저자로서도 활동하는 등 다양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병마와 싸워가면서도 끝까지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라고 했다.

"한번 무너지면 끝장이 날 것 같아서 마지막 끈을 붙들고 있어요. 그렇지만 죽

음이 두려운 건 아니예요. 아주 고요하고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맞이할 수 있을 것같

아요"라고 말하면서.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옥죄어 온 병마와 싸워 가면서 평소 해야할 일들을 차 근

차근 준비해 왔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가수로서 진행자로서 길씨를 아끼던 팬들 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길은정 이름

석자는 죽음 앞에 초연하면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던 대단한 사람으로 오래

도록 기억될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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