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챈티드 월드

입력 2005-01-07 11:37:33

타임라이프 북스 지음/분홍개구리 펴냄

동남아시아를 강타했던 최악의 지진은 돼지가 가려움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설화를 빌리자면 그렇다. 인도네시아 셀레베스 사람들은 지구가 거대한 돼지의 까끌까끌한 등 위에 있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돼지는 등이 가려우면 우주의 숲에서 자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야자나무의 울퉁불퉁한 껍질에 등을 비빈다. 그 바람에 지구가 쿵쿵 울리고 요동을 친다는 것이다. 땅 속에서 나는 꾸르륵꾸르륵 소리는 돼지가 가려운 데를 긁고 나서 이제는 시원하다고 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오래 전 자연의 광폭한 힘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땅이 몸서리를 치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골이 입을 벌릴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폭풍우가 몰아칠 때마다 인간은 무력감을 느끼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한없이 자애롭던 대지와 하늘과 바다가 갑자기 폭주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인간에겐 필요했다. 신과 신화, 거인, 용, 마법 등 초자연적인 존재와 힘들이 인간의 상상에서 뛰쳐나와 현실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과학과 논리가 찾아들면서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현실은 물론 상상의 영역에서도 설 자리를 잃어 갔다. 지금은 누구도 하늘에서 용이 날고 마법사가 폭풍을 몰고 온다는 얘기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천지창조와 거인, 난쟁이, 마법, 용, 마법사 등 미지의 세계와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매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과 영화, 게임, 만화 등을 통해 자연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감과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다.

'인챈티드 월드(황홀한 세계)' 시리즈는 신화와 역사에 관한 책들로 잘 알려진 미국의 타임라이프 출판사가 1980년대 중반 세계의 신화와 전설, 민담 등을 주제별로 정리한 책이다. 그리스와 로마는 물론, 북유럽, 아프리카, 중국, 인도, 일본 등 전 세계에서 전해오는 천지창조, 거인, 난쟁이, 마법, 용, 사랑, 마법사, 유령, 크리스마스 등의 이야기를 묶어냈다. 하나의 주제가 각 지역과 시대, 문화적 차이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 여기에 고야, 로사, 푸생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 100명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의 환상적인 그림을 더해 주제를 더욱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21권의 시리즈 가운데 이번에 출간된 것은 천지창조, 용, 거인, 사랑, 마법 등 5권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의 이야기는 물론 북유럽 켈트 신화와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전설, 아프리카, 한국과 중국, 일본, 인도, 미얀마, 몽골 등 아시아의 신화와 전설, 민담 등도 담았다. 특히 대륙별 창조 신화와 사람과 동물 등 생물체는 어떻게 태어났는지 등을 전하는 '천지창조-세상이 열리던 순간의 비밀'편에 한국의 전통 민담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실려 있는 점도 눈길이 가는 대목. 언어와 문화가 상이하고 지리적으로도 수만㎞ 이상 떨어져 있는 문명권에서 놀랄 만큼 닮은 존재를 믿고, 서로 다른 모양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색다른 묘미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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