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동행(同行)'

입력 2005-01-06 14:34:48

눈 내리는 어느 날 밤. 두 사내가 강원도 산골 와야리라는 곳으로 가다가 우연히 동행을 하게된다. 키 큰 사내와 키 작은 사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동무가 된다. 춘천 근화동 살인 사건으로 말문을 터면서 토끼사냥 이야기 등 어릴 적 기억들을 더듬기도 한다. 한 사내는 살인의 고통에 몸을 떨며 지금 부친의 산소 옆에서 죽기 위해 가는 길이고 그 동행은 살인자를 추적하는 형사. 그 둘은 그렇게 강원도 산골 하얗게 눈 덮힌 길을 걸어가고 있다. 서로의 속내를 좀 채 드러내지 않으면서.

○...소설가 전상국의 작품 '동행'에 나오는 이야기다. 결국 한 인간의 갈등과 쌓이는 눈 보다 더 깊은 고뇌, 그리고 그 고통을 감싸는 동행자의 인간애가 눈시울을 적신다. 소설이 주는 특유한 허구의 세계에서도 이처럼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가 감동적인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왜 그렇지 못할까. 그저 뻥끗하면 거짓말이고 그 자체가 허구인 경우가 허다하다.

○...노 대통령이 지난 칠레 산티아고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 때 부시 미 대통령에게 내년 부산APEC 때 개성공단에 함께 가자고 제안, 이를 부시 대통령이 받아들였다고 공개하자 백악관 측이 즉각 부인하고 나서 또 입방아가 한창이다. 두 정상이 공식회담도 아니고 걸어가면서 나눈 개성공단 동행 이야기를 흘린 것이 화근이다.

○...가뜩이나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6자회담 당사국이나 주변국들이 민감해하며 주시하는 판에 이런 외교가의 파장은 우리에게 아무런 이득이 있을 리 없다. 더욱이 그것이 국가의 정상끼리 나눈 대화마저 결과가 이렇다면 정말 기가 찰 일이다. 소설 '동행'에 나오는 키 큰 사내와 키 작은 사내의 행동처럼 멋진 마침은 왜 나오지 않을까. 형사는 살인자의 인생비극을 이해하며 수갑대신 담뱃갑을 건네며 작별을 고하는데….

○...역경에 '괄낭, 무구무예(括囊, 无咎无譽)'라고 했다. 자루 주둥이를 꽉 묶듯이 재능과 지혜를 간직하면 모든 일이 무사하다는 뜻이다. 영국의 수필가 로버트 린드도 "소크라테스의 명성이 아직도 자자한 것은 칠십 고희의 나이에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리 동행이 좋더라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꽉 묶을 줄도 아는 지혜가 아쉽다.

김채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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