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면 정상리
운문댐을 굽이굽이 돌아 아홉 마리의 용(龍)이 살았다는 구룡산(九龍山·해발 675m) 기슭의 경북도 최남단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 80여 호의 전 주민이 전통적인 삼베짜기를 대대로 전수하면서 맥을 이어가는 곳. 마을입구에는 500년 넘은 고목이 숲을 이루고 그 위에 마을이 있기에 정상(亭上)이다.
워낙 깊은 산중이고 과수나 논 농사가 거의 없어 대마를 심어 길쌈으로 살아온 탓에 삼 일 자체가 한 해 농사의 절반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집집마다 대대로 물려 받은 베틀 한 대씩은 다 있다.
손 쉬운 기계를 마다하고 조상의 손때 묻고 혼이 서린 옛 베틀만을 고집한다.
그래서일까. '청도 삼베'의 빛깔은 곱고 깔끔해 인기가 높다.
입소문을 통해 유명세를 타면서 요즘은 없어서 못 팔 정도. 몇 년 전만 해도 "힘들어 못 하겠다'며 손 놓았던 부녀자들도 다시 베틀로 돌아와 이제 마을에서 삼 농사하지 않는 집은 한 집도 없다.
최억식(69) 이장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 과수나 논 농사도 별로 없는데 삼 농사조차 않으면 살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삼 농사를 해왔다"며 "다행히 토질이 좋아 삼베 질이 곱고 부드러우면서 색깔이 좋아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마음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마는 매년 4월 초쯤 파종해 7월쯤에 수확하는 것이 제격이지만 잎이 무성해지는 5월이면 주민들과 경찰은 함께 비상 경계에 들어간다.
대마초로 말아 피우기 위해 한밤중 삼밭에 들어가 몰래 대마 잎을 따가는 약장사(마약사범)들이 극성을 부리기 때문. 아울러 대마 파종 때도 허가를 받지만 잎을 폐기할 때도 불법유출 방지를 위해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
또 3일은 베고 익히고 껍질 벗겨 말리고 찢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에 다른 농사와 비교가 안될 만큼 힘든 과정의 연속이다.
말리다 자칫 비를 맞거나 수확 시기를 조금만 놓쳐도 일년농사는 헛것이 된다.
전 농가가 삼 농사를 하다 보니 수확기에는 손이 열이라도 모자랄 지경. 부족한 일손은 집집마다 품앗이로 해결한다.
품앗이 일꾼은 허리가 반쯤 굽은 60~80대의 백발 할머니들뿐. 그러나 모두들 40∼50년 간 길쌈으로 단련된 '전문가'들이다.
베틀에 앉은 할머니들은 쉬지 않고 삼을 삼고(실을 잇는 작업) 물레를 돌려 실타래를 감는다.
삼을 이으려면 줄기 한 쪽 끝을 이로 갈라 둘로 나눠 다른 줄기 끝과 함께 허벅지에 대고 손바닥으로 밀어 연결한다.
한 올 한 올 이은 실이 한 소쿠리가 되려면 하루종일 걸리지만 열 대여섯 소쿠리는 돼야 겨우 삼베 한 필을 짤 수 있다.
"19세에 시집와 시모가 돌아가신 뒤 시작하면서 지금껏 베틀에서 손을 뗄 새가 없었다"는 이영시(66) 할머니는 "많이 하는 사람은 1년에 15필쯤 짜지만 보통 8∼10필 정도 하면 500만 원은 번다"고 했다.
최명화(66) 부녀회장도 "옛날에는 삼을 영천 대창장이나 경주 아화장에 내다 팔았는데 요즘은 손으로 짜는 전통 삼베가 귀해 베 짜기 무섭게 팔린다"라며 "이곳 삼베가 곱고 질이 좋은 것은 삼 째기와 삼 삼기를 잘하기 때문"이라 자랑한다.
비록 세상과 떨어져 살지만 정상리 사람들은 손 쉬운 기계식 베틀 대신 힘든 전통방식을 지켜왔다.
1995년 '청도 삼베짜기'가 엄격한 문화재위원회 심사를 거쳐 주민 9명이 함께 무형문화재(24호)로 지정됐다.
기능보유자 장무주(張武周·77) 할머니를 비롯해, 후보자 김영례(73)·장병필(69)씨와 조교 안정자(66)·방두리(65)·이순태(59)씨, 전수생 김태분(53)·김동선(50)·최귀옥(49)씨가 주인공.
그러나, 무형문화재 지정 뒤 각종 지원금 문제로 한 차례 마을이 갈등에 휩싸였고 결국 무형문화재 지정이 취소됐다가 법정공방을 거쳐 복원됐지만 지원금이 끊기기도 했다.
새마을지도자 황문석(50)씨는 "이 때문에 몇 년 동안 주민들 간 앙금이 깊어졌는데 하루 빨리 전처럼 평화로운 마을이 됐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청도군 진상기(53) 문화관광과장은 "삼베짜기 기능보유자를 양성하기 위한 전수회관 건립과 삼베전시장을 마련, 청도삼베가 지역특산물로 성장하도록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청도·정창구기자 jungcg@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