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소원, 헛된 소원

입력 2005-01-05 11:02:44

해마다 연초가 되면 많은 이들이 신년운세를 본다. 구직자들은 취업 여부를 알기 위해, 처녀 총각들은 나머지 '반쪽'을 찾기 위해, 사업가는 사업의 번창을 위해, 저마다 운세에 기댄다. 그것이 비록 잠깐의 위안에 그치더라도 운세를 뒤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새해 해맞이 인파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그 불안은 소원과 소망으로 나타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경제사정은 매우 흐리다. 이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새해 소망으로 가족의 건강과 돈을 맨 윗자리에 올려놓았다. 여러분의 새해 소원은 무엇인가. 건강인가, 돈인가. 소원이 없는 삶은 희망이 없는 삶일 것이다. 하지만 소원이 성취된다고 해도 그 삶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예순 살 동갑내기 부부가 친구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끝날 무렵 천사가 나타나 생일을 축하한다며 무엇이든지 소원을 말하면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는 게 소원이라며 세계 일주 비행기표를 원했다. 천사는 세계 일주 비행기표 두 장을 바로 부인 앞에 떨어뜨렸다.

천사는 남편에게도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남편은 "늙은 마누라는 싫증이 났다"며 "저보다 30세 젊고 예쁜 아내를 달라"고 말했다. 천사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네가 그토록 원하니 네 소원을 들어 주겠다"면서 예순인 남편을 90세 영감으로 변하게 해버렸다. 물론 남편 곁에는 60세 된 '젊은 부인'이 서 있었다.

헛된 소원이 빚은 참담한 얘기는 더 있다. 한 늙은 성자가 여행을 하다 두 사람의 여행자를 만났다. 한 사람은 탐욕스럽고 욕심 많은 심술쟁이였고, 다른 사람은 시기심이 많고 질투심이 많았다. 성자는 그들과 헤어지면서 선물을 주기로 약속했다. 먼저 원한 사람의 소원이 성취되면 다른 사람은 그 두 배를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여행자는 서로 먼저 소원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친구의 두 배 몫을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시기심 많은 사람이 먼저 소원을 말하게 됐다.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심술쟁이 친구가 협박한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먼저 소원을 말하지. 나의 소원은 한 눈이 실명되는 것이야." 그는 즉시 그는 한 눈이 멀었고 그의 친구는 장님이 되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헛된 욕망에서 비롯된 소원성취의 허망함을 전하는 얘기가 적잖다. 미다스 왕은 손닿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소원을 성취했다가 혼이 났다.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도 아폴론 신으로부터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얻었으나 설득력이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카산드라는 조국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했으나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고 트로이 전쟁 와중과 전쟁 이후 갖은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

헛된 소원이 아니라 참 소원을 희구한 사람도 있다. 한 성자가 여행길에 지나던 마을 어귀 정자나무 아래서 하룻밤을 새우려했다. 이 때 한 마을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대뜸 보석을 달라고 요구했다. 성자는 되물었다. "보석이라뇨?" 마을 사람은 "간밤에 신이 꿈에 나타나 해거름에 동구 밖에 가면 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고, 그 분이 값진 보석을 주어 부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성자는 "며칠 전 숲 속 오솔길에서 보석을 주었는데, 갖고 싶다면 가져도 좋다"며 보따리를 뒤져 보석 하나를 꺼내 건넸다. 보석을 본 마을 사람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사람 머리통만큼이나 큰 금강석이었던 것이다.

금강석을 얻어 집으로 돌아온 마을사람은 그 날 밤 내내 이불 속에서 전전반측하며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새벽 첫닭이 울자, 그는 동구 밖으로 달려가 성자를 깨웠다. 그리고 말했다. "이처럼 큰 금강석을 서슴없이 내줄 수 있는 그 마음을 주십시오."

인간이 소원을 비는 것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을 내다봐도 카산드라처럼 설득력이 없다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뿐이다. 만약 천사가 한 가지 소원만 말하라면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빌 것인가.

보리수염도 자문자답 해보았다.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달라고 할 것인가, 영원한 청춘을 달라고 할 것인가. 쉽사리 한 가지 소원을 찾기가 어려웠다. 고작 생각한 것이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어야 했다.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이 성취돼도 그 행복이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만 행복하고 주변 친척이나 친구가 불행하다면 행복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나만 행복하다면 시기를 받을 것이고 그러면 불행해질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넓히다보니 대한민국 국민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발전했다.

지난해 가을 회사 동료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췌장암.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고통 앞에서도 그는 의연했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에 대한 걱정은 끝내 떨치지 못했다. 아이들이 혼자 일어설 수 있는 나이 때까지 만이라도 살기를 바랐다. 보리수염은 그와 비슷한 연배인데다 또래 아이를 두고 있다. 그래서 장례식에서도 그의 아이들이 내내 눈에 밟혔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보리수염 역시 그와 똑같은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앞으로 몇 개월 밖에 못 산다고 선고받으면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빌 것인가. 아마 대부분 몇 년이 아니라 다만 몇 달이라도 더 살기를 바랄 것이다.

연초부터 '죽음'을 얘기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게다. 죽음을 끄집어 낸 이유가 있다. 죽음 앞에 서면 사람들은 대개 겸허해지고 진솔해진다. 이 죽음을 앞에 둔 발원(發願)이 진짜 소원이 아닐까해서다.

소원이 없는 삶, 더 바랄 것이 없는 삶이 행복한 삶은 아닐 것이다. 터무니없는 소원이라 할지라도, 소원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물론 소원이 이뤄진다고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헛된 소원은 그 삶을 참담하고 누추하게 한다.

여러분은 친구의 눈을 멀게 하는 소원을 빌 것인가, 아니면 보석을 서슴없이 내놓은 성자의 마음을 얻겠는가.

조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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