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 나는 인류,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새 출발에 앞선 의사들이 세계를 향해 엄숙하게 서약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의사들은 인술(仁術)을 펼치겠다는 맹세로 첫출발하지만 사회적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의보 수가 문제, 의약분업, 무통 분만 시술 중단 등 의사들을 영리만 좇는 이익집단으로 보는 곱지 않은 시각이 팽배해 있는 것이 현실. 그러나 이런 국민의 따가운 눈총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묵묵히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노숙자·쪽방 거주자 무료진료, 무의탁환자돕기 성금 후원 등 소외된 이웃을 찾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대구시 수성구의사회(회장 이탁)를 찾았다.
수성구의사회는 1981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되면서 경북의사회 산하에서 대구직할시의사회로 분리되고 각 구 의사회로 나뉨에 따라 25명의 회원으로 출범했다. 23년이 흐른 지금 회장 등 17명의 임원이 398명의 회원과 함께 한마음으로 꾸려가고 있다.
수성구의사회가 역점을 두고 펼친 사업은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봉사하는 것. 2002년 회원 36명이 모여 수성구 관내 지산복지관·범물종합복지관·청곡종합사회복지관·황금복지관·홀트복지관과 루시아의 집 등에 성금을 기탁하고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박노선(62·박노선산부인과) 회원은 "수성구 모 아파트 방문진료를 나갔을 때 홀몸노인이 무릎 관절에 화상을 입었는데 상태가 너무 나빠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현대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을 시켰는데 일주일 뒤 그 노인이 돌아가셔서 그때 좀더 치료를 잘해주었더라면 오래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회상했다.
"저도 한번은 쥐가 들끓는 등 불결한 환경의 가정에 무료 방문진료를 나갔지요. 그때 이가 옮아 보름간 고생했다"고 옆에 있던 김영진(43·김영진이비인후과)회원이 뒷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진료 후 남는 뿌듯함은 그러한 약간의 고생을 몇 배나 보상해줬다.
최근 수성구의사회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쪽방 거주자와 거리 노숙자. 경제 불황의 여파로 국민의 15% 정도가 빈곤계층이란 통계가 말하듯이 대책없이 많은 사람들이 추운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회원들은 지난해 2월초부터 칠성동·비산동 쪽방 거주자 무료 순회진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쪽방 거주자들. 소외되고 자신을 추스를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사회에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들에게 현실적으로 손 쓸 수 있는 의료진료는 없었다. 오히려 진료보다는 자신의 신세한탄을 들어주며 위로해 줘 이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게 치료인 셈이다.
"쪽방 거주자 당뇨검사를 하기 위해 손끝을 찔러 피를 채취하려다 피가 적게 나와 정상적인 검사를 하기 위해 실수로 여러 번 찌른 적이 있다"는 정현대(47·정현대신경외과) 회원은 "가뜩이나 먹을 것이 없어 피가 모자라는데 마구 피를 뽑는다며 심한 욕설을 들었다"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요즘은 회원 7명이 한 조가 되어 매주 금요일 동대구역에서 노숙자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 수백 명이나 되는 노숙자들의 건강을 일일이 챙기는 일이 만만치 않지만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을 되뇌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김원섭(49·김원섭비뇨기과) 회원은 "노숙자들을 위해 성심껏 진료를 하지만 병세가 위중한 환자는 동구청이나 적십자병원으로 이송해 치료토록 하고 있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무료진료와 성금기탁 등 수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지만 수성구의사회가 맞닥뜨린 어려움도 적잖다. 특히 아쉬운 점은 의약분업 이후 무료진료 환자에게 약을 공급할 수 없다는 것. 이탁(52·지노메디병원장) 회장은 "지난해부터 대구시에서 약값 전액을 보조해주고 있지만 의사들의 무료진료 봉사활동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약을 구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회원들의 이웃사랑은 계속된다. 지금까지의 봉사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해 불씨를 아예 커다란 불꽃으로 만들 계획이다.
김성우(41) 사무장은 "내년에는 집행임원 중 3명을 봉사전담 전문위원으로 선임해 새로운 회원모집을 독려하고 소식지 등을 만들 생각"이라며 "이를 통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구청 사회복지과와 연계해 사회 구석구석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찾아오는 환자도 중요하지만 병든 이웃을 찾아가 그들과 호흡하며 사회의 그늘진 구석구석을 몸으로 느끼고 싶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성구의사회 회원들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하는 새해 다짐이다.
전수영기자 poi2@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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