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지난 1995년 자유화를 기치로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체제. 농산물의 모든 분야에 대한 수입 빗장이 완전히 풀리면서 우리 농촌은 급격한 개방농정으로 무장해제당했다.
WTO체제 출범 10년. WTO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우리의 농촌은 어떠한가. 농촌 마을엔 이미 아이 울음소리 끊긴 지 오래고 노인들만 남았다.
농촌을 버리고 떠나고 있다.
이대로 농업을 포기할 것인가. 우리 농업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한가. 그러나 질긴 역사만큼 희망의 싹은 트고 있다.
힘들고 괴롭지만 아직 우리 농촌 곳곳에서는 식량주권, 아니 민족 생존을 위해 생명산업인 농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용틀임이 이미 시작됐다.
'식량자급률 27%-OECD 30개 국가 중 27위'. 우리가 스스로 공급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이 수준에 불과하다.
이나마도 주식인 쌀이 100% 안팎의 높은 자급자족을 이뤄내기에 가능한 것이다.
쌀을 제외하면 자급도는 5%로 뚝 떨어진다.
중요성은 더할 나위가 없지만 쌀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지난해 쌀 협상으로 의무수입량이 늘어난 데다 시중판매마저 허용됐다.
게다가 쌀소비량과 재배면적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식량주권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산업인 쌀산업을 지키며 희망의 불씨를 지펴나갈 것인가. 공은 이미 우리에게 넘어와 있다.
■규모화로 생산비 줄인다
쌀산업에도 변화의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다.
규모화는 물론 친환경농법과 '얼굴 있는' 브랜드쌀 생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승부를 거는 농가가 늘고 있다.
머잖아 밀려들 수입쌀에 맞서 살 길을 찾아보자는 몸부림이다.
"쌀시장이 개방되더라도 농민들이 노력하면 우리 쌀산업은 충분히 발전할 수 있습니다.
"
전업농 김종기(56·칠곡군 기산면)씨는 수입 쌀과의 한판 승부를 앞두고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다.
부인, 아들과 함께 47ha(약 14만 평)를 경작하는 김씨는 지난해 조곡 80kg 기준 2천200가마를 수확했다.
경북 도내에서 가장 많은 양이다.
'금종쌀'이란 브랜드로 판매하는 그의 총 수입은 3억원을 웃돈다.
김씨의 성공 비결은 바로 규모화. 지난 78년 400평을 물려받아 벼농사를 시작한 김씨는 여유만 있으면 농지를 넓혔다.
대규모 영농으로 생산비를 줄여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판단이었다.
대형 트랙터 등 그가 보유하고 있는 3억원 상당의 각종 농기계는 그에게 일등공신들이다.
김씨는 "도정·육묘·포장공장도 직접 운영해 영농비를 20% 이상 줄였다"며 "재배시기가 다른 벼를 나눠 심는 것도 비싼 농기계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전했다.
■고품질 시장은 따로 있다
대규모화와 달리 친환경농법으로 활로를 찾는 벼농가도 많다.
전체 농가 중 0.5ha 미만 소규모 경작농가가 44%에 이르는 현실에서 규모화는 분명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불가사리를 퇴비로 활용,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영덕군 남정면 '불가사리쌀 작목반'은 아이디어 하나로 소비자 입맛을 사로잡았다.
골칫거리에 불과하던 불가사리를 쓰자 농약이 필요없어졌고 구수한 맛은 강해졌다.
친환경농법으로 생산한 '햇님가사리 쌀'은 일반 쌀보다 5만원 정도 비싼 가격(조곡 80kg 기준)에 팔리고 처음 30가구였던 참여농가는 지난해 170가구로 불었다.
작목반 최원갑(51)씨는 "이천쌀보다 낫다는 소비자들의 평가를 받을 땐 정말 기쁘다"며 "내년에 작목반이 재배하는 210ha 모두 무농약 인증을 받게 되면 소득이 20% 이상 더 늘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도내 친환경농산물 재배면적과 생산량은 지난 99년 195ha 2천170t에서 2001년 833ha 1만8천544t, 2004년 6월 현재 4천625ha 12만3천887t으로 매년 급증하고 있다.
한쪽에선 고품질, 다른 한쪽에서는 규모화가 추진될 때 수입쌀에 대한 대항력은 커지고 식량안보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브랜드다운 브랜드 만들자
이렇게 잘 지은 쌀을 그냥 팔 수는 없다.
차별화로 인지도와 선호도를 높여야 소비자들이 선택하고 이익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쌀 소비시장과 구매패턴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1인당 쌀 소비량은 지난 1988년 122.2kg에서 2003년 83.2kg까지 줄었다.
또 각종 조사에서 브랜드에 관심이 많다는 소비자는 점점 늘고 있다.
55가구가 참여하는 문경 가은위탁영농법인은 '활성탄쌀'로 지난해 경북도 브랜드쌀 품질평가 대회에서 중소형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생산량은 연간 120t으로 적지만 철저한 품질관리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브랜드쌀은 경북도 170종 등 전국 1천200종에 이른다.
이름없는 쌀은 없는 셈이다.
문제는 영세규모 브랜드가 난립, 소비자 신뢰성이 낮아 실제적 가치를 만들지 못하는 데 있다.
지난해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농림부가 전국 61개 브랜드쌀을 대상으로 한 평가에서 경북서 유일하게 수상한 의성군 삼안미곡종합처리장 이범락(47) 대표는 "단순히 이름만 붙였다고 해서 브랜드가 되는 건 아니다"며 "품질관리 및 홍보에 대한 지방정부 차원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상헌기자 dava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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