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지자체가 도시 환경 대정비라는 명분 아래 달동네에 새옷을 입히고 있다. 오래되고 낡은 동네가 헐리고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 따위가 차지하고 있다.
도시 환경 정비라는 허울만 있을 뿐 정작 개발의 대상인 달동네 '이웃'들은 개발 혜택은커녕 더 못한 달동네를 떠도는 도시 유랑민으로 내몰리고 있다. 2004년 대구 달동네 이웃들을 살폈다.
◇이주비용조차 없어요 1
지난 14일 북구 대현1지구(감나무골)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거환경개선지구 자리엔 이미 10여동의 고층 아파트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동네 곳곳에서 하수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2001년만 해도 이 일대에는 일용직, 모자가정, 홀몸노인 등 681가구, 3천여명의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었다. 이 중 특히 161가구(26.4%)에 달했던 세입자들은 사정이 더하다. 300~500만원의 이주비용만으로는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 힘들었던 상당수 세입자들은 또 다시 재개발 예정지인 대현2지구로 이동했다.
취재팀이 14, 15일 이틀간 이 일대를 탐문, 대현1지구 세입자들 7가구를 찾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동사무소에서 생활비를 지원받는 기초생활수급자들이었으며 홀몸노인(2가구), 노인부부(2), 저소득가구(2), 모자가정(1) 등의 빈곤층이었다.
공동주택(아파트) 방식의 주거환경개선사업 실시를 1년 남겨둔 현재 이들의 최대 고민은 더 이상 이주비용을 지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현2지구가 주거환경개선지구로 공고된 시기는 2001년 7월 14일. 현행 보상 규정상 공고이후 이주민들은 단 한 푼의 보상금도 받을 수 없다. 대현1지구 세입자들 경우 2002년을 기점으로 이주를 시작해 이곳으로 이사 온 20여 가구 모두가 이주 비용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이모(55)씨는 "생활에 쪼들리다 보니 빚이 늘어 전세 보증금 300만원 대부분을 빚 갚는데 써야 한다"라며 "일대 재개발이 최대한 늦춰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라고 하소연했다.
15년간 세 차례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실시한 중구 남산4동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오모(67)할머니는 "처음 이사할때는 300만원의 이주 비용을 받았지만 두번째 경우 보상 규정을 적용받지 못했다"라며 "재개발로 옛날 집이 사라지면서 월세는 자꾸 오르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하다"고 했다.
◇이주비용차조차 없어요 2
윤인환(가명·77), 이숙희(가명·72) 부부는 이주비용 규정이 전무한 재건축 세입자들의 삶 또한 더할 수 없이 고단하다고 했다. 윤씨 부부의 힘겨운 삶은 아들이 부도를 내고 잠적한 1998년부터 시작됐다. 빚더미에 올라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두 손자와 함께 동구 신암동 20만원짜리 월세 아파트에 입주했지만 이 아파트는 2001년 재건축사업이 확정됐고 이사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네식구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재건축 공사가 시작되고서도 한참 아파트를 떠나지 못했죠. 어느 날엔가 '쿵'하는 굉음에 뒤를 돌아봤더니 2층 베란다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습니다. 공사 중에 지지대가 빠진 것 같아요."
겨우 빚을 내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15만원의 인근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빚을 갚느라 꼬박 1년간 공사장을 떠돌아야 했던 윤씨는 전립선염으로 건강을 잃었다. 게다가 이사 온 아파트마저 재건축이 확정돼 또 다시 이주 걱정에 마음을 졸여야 하는 처지다.
윤씨는 "동구 재건축 아파트에는 이사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는 바람에 철거 기간을 넘기고 단수·단전 조치될때까지 가는 세입자들이 부지기수"라고 하소연했다.
남구 봉덕 2동에 사는 김영자(가명·81) 할머니도 재건축 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인근 천계지구가 재건축추진위원회를 설립하면서 바로 이웃한 노후 주택가 역시 재건축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홀몸노인으로 동사무소에서 모든 생활비를 지원받는 할머니는 재산이 단 한 푼도 없다. 서울 집주인이 할머니의 딱한 처지를 잘 알아 월세조차 받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 비용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재건축 사업이 실시될 경우 길거리에 나 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친구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건 죽기보다 싫다"며 "'내'가 살아 있을때까지만 재건축이 연기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이유는 있었다
대구시 건축주택과에 따르면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23개 아파트 또는 단독 주택이 재건축사업을 완료했다. 올해부터 2007년까지 준공하는 재건축 아파트 경우 지난 9년에 맞먹는 22개 사업이 한꺼번에 예정돼 있다.
주거환경개선사업 경우 1990년부터 올해까지 15개지구, 4천718가구에 대해 공동주택(아파트)방식의 재개발 사업을 완료했고 12개지구(5천542가구)가 사업 시행중이며 내년부터는 2단계로 9개지구(3천410가구) 사업이 실시된다.
대구의 달동네 사업은 전면 재개발방식이다. 헌 것을 싹 걷어내고, 천편일률적으로 새 것을 넣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과 기본적인 협의는 있다. 하지만 대개는 행정당국 등에서 도시재정비 계획에 따라 사업 수년 전부터 예정된 수순을 순조롭게(?) 밟는 식이다.
한 도시전문가는 "대구의 달동네 사업은 지구 지정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결여돼 있다"며 "사업 주체인 행정당국 등의 주관적 판단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 속은 어떨까.
이달 지역 한 연구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대구시 주거환경개선사업 전체 사업비의 약 92%가 도로 포장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원주민들이나 세입자들이 가장 절실해 하는 이주 대책비는 관심 밖인 셈.
정부는 원주민 주거 질 향상을 최우선 목표로 두는 주거환경개선사업 취지에 따라 해당 지역 집주인과 세입자들에게 주거환경개선지구에 들어서는 아파트 분양권 1순위 자격을 부여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도시근로자 월평균 가계지출의 3개월 분만 이주비용으로 지급받을 수 있는 세입자들에게 분양권은 아무 의미가 없다. 평균 300~500만 원 내외의 이주비용으로 어떻게 아파트 입주를 꿈 꿀 수 있느냐는 것.
집주인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10평~20평 규모의 단독주택을 소유한 원주민들 경우 보상비가 4천만 원(평당 200만 원 기준) 이하에 그치지만 최소 24평형 이상의 아파트 분양가는 1억 원을 훌쩍 넘는다는 것이다.
대현2지구에서 만난 동네 한 수퍼마켓 주인은 "결국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아파트 입주가 가능한 '부자' 원주민들은 채 30%를 넘지 않는다"고 했다. 사회복지사들에 따르면 주거환경개선사업과 재건축 등 도시 개발 사업이 봇물을 이루면서 달동네 이웃들은 인근 빈곤 지역으로 이동을 거듭하고 있다.
취재팀이 지역 복지 전문가들을 통해 확인한 결과 중구 경우 성내동 대봉동 동인동 , 동구는 신천 신암동 반야월, 서구는 "비산동 내당동 평리동, 남구는 이천동 봉덕동, 대명동 일대, 북구 경우 대현 칠성동 등지에 또 다른 작은 그늘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도시전문가들은 "현재의 재개발은 이주자나 세입자에 대한 대책이 결여돼 이들을 또 다른 그늘로 내몰고 있다"며 "보다 나은 주거환경을 보장한다는 사업 취지가 살아 있다면 수십년 살아온 원주민과 세입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줘야한다"고 지적했다.
기획탐사팀=이종규기자 jong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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