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징역형, 벌금 2억 원

입력 2004-12-14 15:04:07

엊저녁 시험 공부한다며 학원에서 밤늦게 들어온 딸아이를 반갑게 맞았다. 얼굴도 다시 쳐다봤다. 기특해서가 아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흉흉해서다. 이 때문에 딸아이의 귀가가 조금만 늦어도 조바심을 내게 된다. 외출할 때면 아내의 휴대폰을 들려보내고 늦어지면 반드시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밤 심부름을 보낼 때라도 툴툴거리는 아들 녀석만 보내거나 딸아이와 함께 보낸다.

딸아이는 올 들어 부쩍 자랐다. 봄에 사준 청바지를 한 뼘이나 접고 다니더니 이젠 모두 내리고 다닌다. 아직 초등학생이나 키는 아내보다 더 크고 몸도 거의 어른에 버금간다. 같은 학급 남학생 녀석들로부터 심심찮게 선물도 받는 눈치다. 그러나 정신연령은 아직 어린애다. 그래서 더 걱정된다. 제 몸을 제대로 보호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되기 때문이다.

아내가 딸아이를 출산했을 때 장모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딸'이라고 말했다. 보리수염이 독자인데다 가문의 '뼈대'를 강조하는 집안인 까닭에-아내는 이를 두고 살은 없고 뼈만 있는 '멸치 집안'이라고 놀린다-장모가 아마 '죄인'된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보리수염의 친구들 역시 딸을 낳았다는 소식에 "25년 징역형에 벌금 1억 원에 처해졌다"고 비아냥댔다. 25년 간 고이 키워 시집 보낼 때까지 들어가는 돈이 1억 원이나 되니 걱정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만혼 추세에다 치솟은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30년 징역형에 벌금 2억 원'으로 상향 조정이 불가피할 것 같다.

그러나 딸아이가 자라면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아들인 보리수염이 부모님에게 하는 것보다 딸인 여동생들과 아내가 친정 부모님에게 더 잘했기 때문이다. '여권(女權)'이 신장된 세태도 딸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보리수염도 약삭빠르게 세태에 편승했다. 종신보험에 가입할 때 보험수혜자로 아내와 아들 대신 대뜸 딸아이 이름을 올렸다. 아내는 속 들여다보인다며 비웃었다. 늙어 힘없을 때 '딸 덕 ' 보자는 속셈이 아니냐는 것이다. 부인하지 않았다. '딸딸이' 아빠인 친구들이 아들을 부러워할 때도 딸이 아들 보다 훨씬 낫다며 격려했다. 그런데 이번 밀양 고교생들의 울산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접하고 보니 보리수염은 다시 '갈대'가 된다. 딸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다면 딸이 좋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됐다.

딸아이는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간다. 요즘 중학교도 대부분 남녀 공학이다. 이게 더욱 걱정이다. 중학생이 되면 남학생들도 사춘기에 들어서고 성(性)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 포르노물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외부 자극은 무한정인 반면 이를 해소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 학교도 믿을 수 없다. 경찰이 펴낸 미성년자 성폭행 진술기록 자료집을 보니 더욱 그렇다.

특히 경북 구미경찰서 여경이 작성한 보고서는 성폭행을 가능하게 하는 학교 내 폭력과 억압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중학 3년생 '학교짱' 5명은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자 아이를 상습적으로 집단 성폭행 했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여러 학생이 보는 앞에서 끌고 가기도 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으나 도와주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여자 아이는 고층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고 화장실에서 손목에 칼을 대기도 했단다.

생각하기도 싫겠지만 여러분의 딸이, 여동생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성인도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어린 여자 아이가 받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지옥'일 것이다. 어쩌면 가정생활조차 파탄에 처할 지도 모른다. 아마 모르긴 해도 법에 호소하기 보다 가해자에게 직접 물리적 응징을 가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 힘들지 않을까.

달리 보면 남자 아이들도 어른들이 만든 유해환경의 피해자다. 학교 밖을 한 발짝만 나서도 유혹은 차고 넘친다. 도처에 지뢰밭이다. 10대 남자 아이들이 왕성한 성 충동을 스스로 제어하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그러나 학교와 가정의 성교육은 미진하기 그지없다. 뚜렷한 지침도 없고 순결교육이 전부다. '불만 질러 놓고 소방대책은 전무하다'는 얘기다. 이러니 성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고 상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성폭력 피해자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 때부터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에 오랫동안 살아 왔다. 그래서 폭력 행위에 대해 매우 무감각하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경찰이 밀양 고교생 성폭행 사건을 다루면서 피해자에 대해 폭언을 일삼고 수치심을 안긴 것도 경찰의 이러한 구습에 기인한다.

질풍노도의 10대들에게 분출되는 성을 무조건 참으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냥 참으라고 한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올바른 성을 제대로 가르치고 성폭행은 고문과 마찬가지로 '인격 살인'이며 가정파괴 행위라고 교육해야 한다. 이 뒤에 무거운 죄로 다스려 성폭력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