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돈 지역 재투자"…현지 법인화 요구 거세져
대구·경북은 1996년 이후 역외 대형 할인점들을 규제할 수 있는 정책이 아예 없었다.
재래 상권 붕괴, 교통 요지 '함락', 자금 유출….
싸고 편리한 '대형 할인점' 군단이 대구·경북을 초토화시켰고, 할인점 10년을 맞는 내년엔 가장 많은 8개 점포가 대구·경북에 한꺼번에 출점하지만 '시'와 '도'는 여전히 뒷짐이다.
다른 곳에선 자치단체와 시민단체가 나서 대형 할인점들의 무분별한 지방 진출에 제동을 걸고 있다.
◇자치경제 실현.
"지방 분권 시대에 문어발식으로 지역 경제를 갉아먹는 역외 자본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전북이마트 지역법인화를 위한 도민연대회의'는 "서울 수도권 대형 할인점들은 역내에서 자금이 순환되고 서울 수도권 내에 입지한 협력업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만 지방의 경우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했다.
대형 할인점들은 지역 영세 유통업체들조차 경쟁 대상으로 여기고, 소규모 할인마트가 특정 제품에 대해 할인행사를 벌일 경우 해당 품목을 제공한 도매업체들에게 납품 중단 같은 유무형의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 또 이로 인해 소형소매점이 고사하면 대형 할인점들의 저가 정책은 자연히 후퇴할 수밖에 없어 소비자가격 인상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도민연대 관계자는 "전북 역시 대형할인점 등장 이후 수많은 도내 자영업자들의 생계 기반이 붕괴됐다"며 "대형 할인점들은 100% 본점 직영체제다 보니 도내 상인들 참가가 전무하고 농수산물, 공산품 등 영세한 1차 생산자들 경우 서울에 있는 이마트 본사 구매 담당자들에게 상담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도민연대는 지난 2년여 간 지역법인화 운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북지역에서 연평균 2천5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마트는 1998년 출점 당시 지역 농수산물의 70% 이상을 구입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 비중은 3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게 도민연대 주장이다.
도민연대에는 전주 군산 익산 남원 YWCA, 전주포럼, 전북소상공인연합회, 전북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전라북도여성단체협의회, 참여자치 군산시민연대, 전주청년회의소는 물론 변호사, 교수 등 사회 지도층까지 가세해 범 시민연대를 구축했다.
김현종 전주포럼 대표는 "이마트를 지역법인으로 전환해 구매팀을 상주시키면 지역 경제 주체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민연대소속 강영신 변호사는 "지역 법인 설립 비용 등 기업의 추가 부담은 국가나 지방단체가 지원할 필요가 있다"며 "지역 법인화 활성화를 위해서라면 세금감면혜택 등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 지역법인화를 요구하는 1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 전북도와 이마트가 지역 상품 발굴 및 구매를 늘리는 약정을 체결하는 데 일조했다.
원용찬 전북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소 지방도시에 진출한 대형 유통자본은 지역 경제에서 독점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지방분권 시대를 맞아 외부자본을 토착화시키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왜 지역법인화인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현지 법인으로 진출한 광주 신세계 백화점의 사례는 '왜 지역법인화인지'를 잘 보여 준다. 신세계는 1995년 8월 개점을 앞두고 상권 현황과 소자비 욕구 등을 파악하는 마케팅 조사 활동을 벌이면서 지역 사회와 소비자가 외부 유통업체가 유입되는 데 크게 불안해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신세계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 법인을 설립했다. 개점 3년 만에 흑자를 냈고 2002년에는 증권거래소 상장으로 기업 가치를 극대화했다. 1천500여명의 지역 고용을 창출했고, 광주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자금을 관리, 지역 내에 자금이 회전토록 했다.
4대 지역 친화사업도 전개해 2002년까지 모두 30억6천500만원을 투자했다.
광주 신세계장학회를 결성했고, 전 사원이 참여하는 자원봉사단을 구성해 사회봉사사업을 벌이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후원금 기탁은 물론 광주 연고 여자 프로농구단도 운영 중이다.
지역 생산물의 전국 확대를 위해 우수 협력업체에게는 대금결제조건 개선, 매장 상설화, 기술지도, 산지계약 등의 혜택도 부여하고 있다.
광주시 관계자는 "본사에만 구매팀을 두는 역외 대형 할인점들과는 달리 농산, 수산, 축산으로 나눠 자체 매입전문가를 두는 신세계백화점 경우 지역생산물 판로확대에 큰 도움이 됐다"며 "법인세, 부가세, 취등록세, 주민세를 모두 시에 납부해 세수 확충 효과도 상당하다"고 밝혔다.
◇대형할인점을 막아라
지역법인화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대형 할인점'의 무분별한 도심 진입을 막으려는 노력은 전국 지자체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대열에 합류하지 않는 지자체는 대구시와 경북 지자체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가장 강력한 대책을 마련한 곳은 대전시이다. 시는 대전발전연구원에 할인점 대응방안 연구용역을 의뢰해 3천㎡ 이하 대형 할인점 출점을 모두 차단했다. 인구 146만의 대전에는 12개 할인점이 들어서 이미 포화 상태라는 용역 결과 때문이다. 대전시는 곧이어 전국 시도지사 협의회에 할인점 지방진출 제한 방안을 상정했으며 '5년 규정'의 건설교통부 교통영향평가 기준을 강화해 구시가지는 10년, 신시가지는 15년 이상 교통량 증가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또 대전시장까지 직접 나서 "소비자들이 할인점을 선호하지만 재래시장 위축, 교통 혼잡, 자본의 역외 유출 등 부작용이 심각하다"며 "좀 더 까다로운 규정을 적용해 대형 할인점의 도심 진출을 제한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서울 대기업의 지역 유통법인을 보유한 광주도 주민 반대 여론을 수렴해 지금까지 두 차례 대형할인점 설립을 막았다.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라 할인점 등록을 막을 길은 없지만 교통영향평가기준을 엄격하게 제한하거나 공청회 개최 등을 통해 반대 여론을 대내외적으로 알린 것.
충북 역시 최근 "할인점은 인구 15만명 당 1개 점포가 적정하다"는 공문을 작성했다. 할인점 때문에 재래상권이 급속히 위축되고 지역 소비자들의 자금 역외 유출이 심화되고 있다는 자체 분석 때문이다.
청주 경우 재래시장 붕괴가 사회문제화하면서 할인점 규제가 시장 공약 사항이 됐다.
청주시는 올 7월 약속대로 대형 할인점 건축을 제한했다. 시 관계자는 "연면적 1만㎡ 이하의 대형 할인점 경우 도시계획 심의없이 바로 건축이 가능했지만 시 조례를 개정해 모든 건축물을 심의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제천, 강릉, 원주 등 다른 지자체도 할인점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땅값이 싸 할인점들이 주로 생기는 준공업지역에 일정 규모 이상의 소매점이 들어설 수 없도록 조례를 개정했고, 교통영향평가 등 행정규제도 강화하고 있다.
지자체 한 관계자는 "할인점 진출을 규제할 경우 해당 주민들의 반발도 있겠지만 자치단체 입장에서는 지역 소매 상권을 보호하고 교통 혼잡을 막아 쾌적한 도심 환경을 지켜내는 게 더 중요한 가치"라고 밝혔다.
기획탐사팀=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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