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0년대 초·중반 정치적 암흑기에서 제1야당의 총재로서 제도권 야당의 명맥을 이었던 이민우(李敏雨) 전 신민당 총재가 9일 조용히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졌다.
이 전 총재는 지난 58년 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6선을 거쳐 87년 신민당 총재를 끝으로 정계은퇴할 때까지 한국정치사, 특히 야당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비록 김대중(金大中)·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이른바 '3김'의 그늘에 가려 대권 도전 기회까지는 잡지 못했지만, 40여년 동안 야당의 외길을 걸으면서 제 1야당의 당수까지 오른 야당 지도자였다.
특히 고인은 전두환 정권 시절 말기인 지난 86년 12월 직선제 개헌논의의 와중에서 내각제 개헌과 선(先) 민주화론을 주장한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등 '양김씨'가 탈당하고 신민당이 와해되자 정계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한동안 정계의 핵으로 떠오른 적도 있었다.
당시 홍사덕(洪思德) 신민당 대변인이 깊게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이민우 구상'이란 △언론자유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국회의원선거법 개정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지방자치제 실시 등 7개항의 민주화 조건을 선행하면 내각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제안이다.
3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걸어온 고인은 87년 정계 은퇴 후 정치와는 인연을 일절 끝은 채 조용하게 말년을 보냈다.
특히 이 전 총재는 야당 중진 때는 물론 야당총재 시절과 정계은퇴 후에도, 99년 태릉의 한 아파트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강북의 삼양동 구옥에서 기거, '삼양동거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고인은 '어진 돌'이라는 뜻을 지닌 인석(仁石)이라는 호에 걸맞게 후덕하고 서민적인 풍모에다 모나지 않는 인품으로 생전에 여야 정치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평가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9월 5일 청주에서 태어난 이 전 총재는 41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를 중퇴한 뒤 46년 충북신보 영업국장을 거쳐 48년 고향인 청주에서 시의회 부의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이 전 총재는 58년 4대 민의원으로 중앙정계에 입문, 5·7·9·10·12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부의장(78년)도 지냈다.
원칙에 충실한 보수정치인이었던 이 전 총재는 한 번도 계보를 바꾸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4·19 이후 장면(張勉) 총리의 인준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당 신·구파가 심각한 갈등을 빚을 때 구파에 속했던 인석은 구파가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와 신민당을 창당하자 이에 가담한 이래 야당의 거목이었던 유진산 선생이 이끄는 진산(珍山)계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다.
진산이 작고한 이후에는 유치송(柳致松) 전 민한당 총재와 함께 '견지동 동우회'를 이끌어왔다.
9대 국회 후반 신민당이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강경파와 이철승(李哲承) 전 신민당 총재의 온건파로 대립할 때 YS가 주장한 단일지도체제를 지지, YS와 정치적인 동지관계를 형성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5·17 이후 YS가 정계은퇴 성명을 냈을 때 3개월가량 총재권한대행직을 맡았으며, 정치규제 중에는 YS주도의 민주산악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고인이 정치권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때는 85년 12대 총선 직전 '양김'씨가 힘을 합쳐 '재건'한 신민당의 총재를 맡아 총선에서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 중구에서 출마했을 때다.
당시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종로·중구 출마를 권유하자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고심 끝에 "어려운 일을 회피하면 위선자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조직의 명에 따르겠다"며 출마를 결심, 당선돼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이후 이 전 총재는 87년 '이민우 구상' 파문으로 끝내 '양김'의 벽을 넘지 못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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