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기와 버리기

입력 2004-12-07 11:49:21

요즘 새벽마다 아들 뻘인 고교생들과 함께 뒤늦게 수영을 배우고 있다. 수영 강사들이 '수영 초보'들에게 맨 먼저 익히게 하는 게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숨쉬기다. 이어 부표에 손을 가볍게 얹고-수영 강사는 절대로 '잡지' 말라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다-머리를 물 속에 집어넣었다 뺐다 하면서 물 위에 떠있는 연습을 시킨다.

언뜻 쉬운 것 같았으나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젊은 동료'들은 곧잘 하는데 두어 번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이내 숨을 제대로 들이키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수영 강사는 몸에 힘을 빼고 물에 적응해보라고 하나 몸 따로 마음 따로 다. 뜻대로 안되니 덤벙대게 되고 개구리 물먹듯, 술꾼 막걸리 마시듯 계속 수영장 물만 들이켜 배만 볼록해진다.

왜 안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물에 대한 두려움과 조급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부표를 움켜쥐게 되고 몸은 가라앉았다. 휴일을 이용해 혼자 수영장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물만 들이키고 말았다. 겨우 두 호흡 동안 떠있는 게 고작이었으나 세 호흡이 가능해지자, 자신감이 생겼다. 힘을 더 빼기로 했다. 물에 온 몸을 맡겼다. 곧 물 속에 머리 집어넣기를 반복할 수 있었고 몇 분간 물에 뜰 수 있게 됐다. 이어 이튿날 '젊은 동료'들과 수영장을 오가는 '시합'에서 제일 먼저 도착하는 기염을 토하게 됐다.

여기서 '바보 도(道) 터지는' 원리를 하나 터득했다. 움켜쥐려고 하면 할수록 몸은 가라앉고 부표는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세상사는 이치도 이와 비슷하다. 이삿짐을 꾸릴 때나 사무실 책상을 정리할 때도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늘 고민하게 된다. 버리자니 왠지 나중에 필요할 것 같고 남겨두자니 거추장스럽고... 그러나 대부분 세월이 흐르고 나면 필요 없는 물건이나 자료로 판정 나 그 당시 버리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된다. 버리지 못해 챙기고, 비우지 못해 채우게 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두려움과 욕심 때문이다. 또 비워야 채워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

가정과 직장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자식들에 대해서는 마음 비우기가 참으로 어렵다. 사소한 잘못에도 간섭하거나 언성을 높인 뒤 후회하는 경우가 잦다. 직장에선 힘든 일은 피하면서 줄 세우기를 통해 직장 내 권력과 사다리를 놓는 '권력 중독자'들에 대한 미움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버리고 비우는 것은 탐욕과 이기심,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라'는 성서의 가르침도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마음을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의 대형 교회들을 보면 전혀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형 교회가 주축인 한국 개신 교회 보수교단들은 연일 목청을 높이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 엄혹한 현실에 눈감고, 귀 막고 입 닫았던 행태와 전혀 딴 판이다. 배부른 대형 교회들은 도무지 '다이어트'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부른 배를 비워야 다시 채워질 터인데 깊은 신앙심으로도 그 방법을 찾지 못하는 모양이다.

법정 스님은 '두려워하지 말자'는 글에서 "두려움의 실체보다도 두려워하는 그 마음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두려움은 몸의 근육을 마비시키고 혈액순환에도 영향을 미쳐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명의 활동을 저해한다."고 말했다. 또 "병균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도 전염된다"며 예화(例話) 하나를 전한다.

---한 순례자가 순례의 길에서 흑사병(페스트)과 마주치자, 물었다.

"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냐?"

흑사병이 대답했다.

"바그다드로 5천명을 죽이러 가는 길이오."

며칠 뒤 순례자는 되돌아오는 흑사병을 보고 따졌다.

"너는 일전에 나한테 바그다드로 5천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는데, 어째서 3만 명이나 되는 무고한 생명을 죽였느냐?"

이때 흑사병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내가 말한 대로 5천명만 죽였소. 그 나머지는 두려움에 질려서 자기네들 스스로가 죽은 것이오."---

이처럼 두려움에 갇혀 비우기와 버리기를 실천하지 못하면 우리 삶 자체가 어두워진다. 동서양의 현자(賢者)들은 행복한 삶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라고 가르친다. 누구나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욕심이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한 삶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외치면서 속도경쟁에서 이탈한 '다운시프트' 족(族)들은 이미 이를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이기심과 욕심, 미움을 버리는 마음 비우기가 왜 이리 어려울까. 선뜻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언제쯤 생길까. 진짜 배고픈 사람이 천지인데 이것조차 감정의 사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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