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알고 지내는 한 고교 수학 교사를 우연히 만났다.
세상이 온통 수능시험 부정사건으로 어수선한 때라 인사치레로 "요즘 수능 땜에 골치 아프시죠?"라고 했더니 "안 그래도 죽을 맛"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쪽을 향했다.
"그동안 수능시험이 쉽게 출제돼 안이했어요. 학생들에게 깊이 있는 공부를 못 시킨 거죠. 수리 가형을 망쳤다고 기가 죽은 아이들을 보니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 그러면서 그는 겨울방학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방학 동안 수학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은 물론 국내·외 대학 선발고사 문제까지 분석해서 내년엔 더 잘 가르쳐야겠다는 것이었다.
순간, 40대 중반의 고락이 물씬 배인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 환한 빛이 쏟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禮記)'에서는 이를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했던가. 스승은 학생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더 공부하고,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더욱 뛰어난 인재로 성장한다더니.
나의 오해를 솔직히 말했더니 그는 "교사와 학교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라며 씁쓸해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더 큰 데 있었다.
"이제 학교 시험까지 감독을 강화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신의 중요성이 커지는 내년 고교 신입생들은 아마 저희들끼리 부정행위를 감시할지도 모릅니다.
교사가 학생을 불신하고, 친구가 친구를 감시하는 곳이 과연 학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은 왜소했지만,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페스탈로치의 삶이 떠올랐다.
'이런 교사들이라면 희망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혁명을 꿈꾸다 좌절한 젊은 페스탈로치는 자신의 미래를 교육에 두고 시골에 학교를 만들었다.
빈둥거리며 도둑질과 동냥질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시키고, 목화공장 일을 시켰다.
그러나 아이들은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했고 목화로 장난치기를 즐겼다.
부모들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고, 후원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처절한 실패였다.
그 후에도 그는 온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고난과 역경에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 교육에의 열정을 잃지 않고 평생을 교육 한길을 걸었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저 유명한 그의 묘비명처럼.
수능시험 부정사건이 터진 이후 많은 이들이 교육계에 돌을 던지고 있다.
마치 부정을 가르치고 부추기고 방조한 원죄라도 있는 것처럼. 그리고는 대입 제도 개선이라느니, 시험 관리 감독 강화라느니, 오래 가지도 못할 미봉책들을 대안이랍시고 쏟아낸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를 내세워도 교육과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가 없는 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겨울 초입에 우연히 만난 수학 교사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 땅에 아직 수많은 페스탈로치가 존재하고 있으리란 기대가 생겼는지 모른다.
내년 봄에는 한층 더 원숙한 교사가 돼 있을 그를 다시 만나 손이라도 한 번 잡아줘야겠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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