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문화유산-영천 인종대왕태실

입력 2004-12-02 09:04:26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은해사 입구에서 약 150m 들어가면 백흥암 쪽으로 가는 길목이 나오고 이 길을 따라 1.8km 들어가면 신일지라는 못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백흥암과 운부암 가는 길로 갈림길. 그 사이 정면에 나타나는 봉분처럼 생긴 산은 한눈에도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수직각으로 뻗어 하늘을 떠받치는 형태로 서있는 태실봉. 그 태실봉의 소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석물들이 요란하게 흩어져 있다.

인종대왕(1514~1545)의 태실은 그렇게 버려져 있었다.

조선 12대왕을 탄생시킨 태실의 위엄은 간곳없고 여기저기 흩어진 석조물들이 세월을 지키고 있다.

태실은 태를 묻은 곳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를 몸의 일부라고 여겼고, 그래서 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태를 왕자와 공주의 신체와 같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의 태실은 왕의 즉위년에 주로 만들어졌다.

태실봉 정상의 인종태실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귀농대(龜籠臺). 거북모양으로 가봉비(加封碑)의 비좌로 쓰인 귀농대는 비를 꽂은 귀부(龜趺)와 지대석을 깎아서 만들었다.

귀농대는 조각모양이 섬세해 조선 후기 석공예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비좌로 쓰인 귀농대는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나 가봉비는 현재 반파된 상태로 이수를 포함한 윗부분과 비 아랫부분이 방치돼 있다.

가봉비는 그 크기나 이수 조각의 전체적인 설정이 매우 사실적이고 세부묘사가 뛰어나다.

화강암으로 된 비 전면에는 좌우의 용 두 마리가 가운데 있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양각돼 있다.

왼쪽의 용은 입을 벌리고 혀를 길게 빼고 있고 마주보는 오른쪽 용은 입을 다문 채 이를 드러내고 있다.

비의 명문에는 거의 다 마멸됐으나 '인'(仁)자 하나만 확연히 드러나 있다.

다만 인종 사후 명종 즉위시 건립되었기 때문에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이라고 적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왕의 태실은 백성들에게는 신앙과 같이 신성시됐다.

태실봉을 감싸고 있는 은해사는 창건 당시 해안사라 불렸으나 1546년(조선 명종 원년) 천교화상이 현재의 위치로 옮긴 뒤 은해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자 영조의 어제완문을 보관하는 임무를 맡은 사찰 역할을 맡았고, 조선시대 4대 부찰에 속할 정도로 사세를 크게 떨쳤다.

영천 향토연구사 김종식 회장은 "은해사 입구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점으로 미뤄 이곳이 얼마나 신성시됐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왕의 권위를 말해주며 신성시되던 태실이 방치된 것은 일제의 만행이 스쳐갔기 때문.

일제강점기 1929년 일제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태실과 왕릉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3원과 46묘, 54기의 태실을 공동무덤 형태로 모아두고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계획했다.

특히 서삼릉의 담장을 날일(日)자 모양으로 쌓아 쇠말뚝 만행처럼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시켰다.

일제 강점기 이후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수십년 방치돼 온 인종대왕 태실. 영천향토사학연구회는 "민족의 뿌리찾기와 문화재 보전 차원에서 관계당국이 복원계획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천·이채수기자 cslee@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