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지킬 것은 지키자

입력 2004-11-30 09:41:25

몇 해 전 프랑스의 한 저명한 건축가가 방한했을 때였다.

우리 측 인사들은 한국의 눈부신 건설상에 대해 자랑 섞인 브리핑을 했다.

2, 3년이면 생기는 아파트 단지, 역시 그 정도면 올라가는 고층 빌딩, 그보다 약간의 시간이 더 소요될 뿐인 도로와 지하철… 우리 사회의 발전을 압축해 표현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뽐낼 만한 업적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한국인들은 짓기도 잘 하지만 부수기도 잘 한다는 것이었다.

옛것을 놓아두고 그 옆에 새것을 짓는 저들의 관습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건설 풍경은, 이른바 개발의 무절제 위에서 파괴와 병행하는 아이러니로 투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일이 그렇다.

새것이 하나 도입되는 순간, 옛것은 제압되고 철거된다.

이런 생활양식 속에는 새것은 좋은 것, 옛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잠복해 있다.

그 생각의 전형적인 표출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 나타나듯 진보는 좋은 것, 보수는 나쁜 것이라는 의식의 왜곡이다.

작고한 어느 평론가는 십수 년 전에 이런 성향을 이미 '새것 콤플렉스'라는 말로 잘 분석한 바 있다.

이런 현상의 실례들은 도처에 있다.

사조나 사상가의 이름이 하나 들어오면 그 내용의 올바른 소개도 생략된 채 지식사회의 유행이 되고, 여기서 소외되면 지적 낙오자가 되는 풍토. 자동차든 냉장고든 새것이 나올 때 곧장 바꾸지 못하면 열등 가정으로 백안시되는 풍토. 누구든 새것을 좋아하기야 하지만, 문제는 새것 때문에 옛것을 쉽게 버린다는 점에 있다.

요즈음은 아예 옛것에 머무는 일체의 태도와 사람들을 가리켜 수구꼴통이라고 한다던가.

세상은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

사람 또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인간이나 사회 모두 유기적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전통적인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에서 추구되는 최상의 가치는 '새로움'이다.

그러나 이 새로움은 단순한 신기(新奇) 아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독창성이며 자기쇄신의 몸짓이다.

그것은 치열한 자기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 질서나 가치관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나 파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판은 새로움을 낳고, 그 새로움은 옛것의 옆자리에서 신구의 대비를 통해 도전을 꿈꾼다.

그 도전은 다시 새로운 도전을 만나고, 신구의 대비는 부단히 계속된다.

우리는 지금 변혁기를 살고 있다.

정치적 변혁, 기술적 변혁, 도덕적 변혁, 그리하여 마침내 풍속 자체가 변하는 소용돌이 속을 지나고 있다.

그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변화 자체가 선(善)은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혼란이 있다면 변화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선인 것처럼 인식되는 잘못된 현실에 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이용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선악의 개념은 개입되지 않는다.

선이 선택된다면, 오히려 스피디한 기술문명과 도시사회의 뒤안길에 버려진 고향의 토담집 아닐까.

이런 나의 진술은, 그러나 결코 낡은 복고의 음색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빠름과 더불어 느림을, 성급함과 함께 침착함을, 의(義)의 강박과 함께 타자에 대한 깊은 배려를 나는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사실 새로움 때문에 옛것이 지켜지지 못하고 소멸된다면, 그 새로움 역시 조만간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정치의 문제는 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구악은 물러가고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더 이상 신선하게 들리지 않는 까닭은, 그 음성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방식은 너무나도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옛것은 낡아 보이고 더 이상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주는 사회는 아름답다.

문화와 전통이란 그 통 속에 향기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씩 축적되어갈 때, 시간과 더불어 선별이 가능해지고 참다운 쇄신의 새로움, 진보가 이루어지리라.김주연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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