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삶-(10)네팔:쿠마리

입력 2004-11-15 17:09:30

"쿠마리 보셨어요?"

숙소의 식당에서 한국인 여자 여행객이 묻는다. 그녀는 네팔 여인들이 입는 붉은색 사리를 입었다. 가볍게 고개를 젓자 그녀는 마치 이야기할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건다.

"살아있는 여신! 너무 신비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끝에는 살아 있는 신이 여자라는데 방점이 있다. 하지만 쿠마리의 신성을 인간이 제한하고 있다는 데 이르면 신비감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쿠마리는 살아있는 신의 나라 네팔의 상징이다. 네팔을 찾는 많은 여행자들은 살아있는 소녀 신을 보기 위해 쿠마리 사원(Kumari Bahal)을 찾는다.

쿠마리는 옛날, 힌두교의 탈레주라는 여신이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으로 카트만두 왕국에 나타난 전설에 기인한 신이다. 영특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극진하게 아끼던 왕은 어느 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욕정을 참지 못하고 범하려 들었다. 그러자 여신은 "너의 나라는 멸망하고 너는 목숨을 잃으리라"라는 저주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여신을 위한 사원을 짓고 여신의 현신을 간절히 기도한다. 그의 진심어린 기도를 받아들인 여신은 초경을 겪지 않은 순수한 어린소녀를 선택해 자신의 분신으로 섬기기를 명한다. 이후 왕은 어린소녀를 뽑아 여신으로 섬기기 시작했고, 이 소녀가 바로 쿠마리가 된 것이다.

쿠마리는 보통 5세에서 8세의 나이에서 선발된다. 기본적으로 네팔의 원주민인 네와르(Newari)족 중에서 불교도이며 금세공사 신분인 샤카족에서만 선택된다. 샤카는 '석가모니'의 샤카를 뜻한다. 일단 이런 조건(32가지)이 갖추어진 가운데 선택된 소녀는 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방에 갇혀 하루를 지내게 된다. 더구나 그 방에는 소, 돼지, 양, 닭 등의 머리가 피 냄새를 풍기며 놓여 있다.

소녀가 무서워서 견디지 못하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게 되면 자격이 없는 것이고 무난히 견디면 비로소 신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쿠마리가 되면 축제 기간인 1년 중 9월에 열리는 축제에 단 한번 3일을 제외하고는 밖에 나갈 수 없다. 또한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피가 몸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 뜻하지 않게 상처가 나서 단 한 방울의 피를 흘린다고 해도 이미 그녀는 부정을 타는 것이 되고, 쿠마리의 자격도 박탈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첫 생리가 시작되면 화려한 쿠마리로서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서른여섯의 나이까지 생리를 하지 않은 쿠마리가 있었던 것을 아세요?" 그녀는 고개를 내젓는다. 인간이 신으로 남기 위한 몸부림, 신성의 부정을 거부하려는 몸짓이 만든 기형이다. 그것은 여신이 아닌 평범한 삶이 어떠한가를 알고 있는 탓이다. 쿠마리는 자격이 박탈되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함께 살면 가족들이 죽는다고 믿기에 가족들에게조차 버림을 받는다. 또한 결혼을 하면 남편이 일찍 죽어 버린다고 믿기 때문에 결혼도 하기 어렵다. 결국 인간으로 전락한 신은 가정과 사회에서 외면을 당하게 된다. 인간이 제한한 신성의 끝은 안타깝다.

"야만적이네요." 그녀가 매만지는 짜이(홍차에 우유를 탄 차) 잔에 아픈 마음이 잔뜩 묻어난다. 아마도 그녀는 여자이기 때문에 쿠마리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순간이 더 애절하리라. 쿠마리 사원을 찾지 않은 것은 야만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와 바꾼 다섯 살, 어린 쿠마리의 유배 공간을 부딪칠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퍼슈파티나트(Pashpatinath)는 가보셨나요?" 그녀에게 묻는다. 네팔 최대의 힌두교 사원, 파괴의 신 시바의 사원, 퍼슈파티나트는 힌두교 신자가 아닌 외국인은 들어갈 수 없다. 결국 그녀에게 묻는 것은 사원이 아니라 사원과 함께 있는 화장터를 보았냐고 묻는 것이다. 네팔은 인도와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장례를 한다. 한 줌의 육신조차도 이승에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티베트와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인도나 티베트는 가족을 제외한 이들에게 의식을 보이기를 꺼려하는 반면에 네팔은 모든 절차가 공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퍼슈파티나트 사원의 매표소를 지나면 작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화장터가 마련되어 있다. 왼쪽의 2개는 왕족을 위한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4개의 제단은 서민들을 위한 것이다. 노란 천으로 덮인 시신을 제단 위에 올려놓기 전에 유족들은 기도를 올린다. 우물 정자 모양으로 통나무를 쌓아 올린 제단 위에서 맨발을 한 남자 유족들은 붉은 가루가 뿌려진 시신을 들고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 돈 다음 머리를 왼쪽으로 눕힌다. 그것은 갠지스 강의 지류인 신성한 바그머띠 강의 상류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유족들 중 남자들이 강의 물을 손으로 떠 와 망자의 입에 넣어주면 화장을 집행하는 이가 나무에 불을 붙인다.

시신이 거의 다 타갈 무렵, 짚단을 물에 적셔 머리 쪽에 놓아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것은 영혼이 연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한줌의 재조차 남기지 않는 길, 이별은 의미 없는 것이기에 통곡은 없다. 죽음이 슬프거나 두렵지 않은 것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윤회를 믿기 때문이며 누구나 한 번은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전 무섭기도 했고 냄새 때문에 다 보지 못했어요." 그랬으리라. 초대받지 않은 낯선 의식에 참가한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더구나 여자들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네팔의 장례를 여자 혼자서 끝까지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이 없다.

"네팔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머리를 묶은 띠를 풀며 혼잣말처럼 묻는다. 그녀의 한 쪽 손에는 방금 꺼내 든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다. 히피들과 트레킹 천국, 마오이스트와 신들까지, 그녀의 말처럼 네팔은 과거와 현대가 겹치는 정지된 시간을 만나게 되는 나라다. 파탄(Patan)이 그렇고 박타푸르(Bhaktapur)가 그렇다.

아니 카투만두가 그렇고 룸비니가 그렇고 네팔의 모두가 그럴지도 모른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은 영화 "리틀 붓다(Little Buddha)"에서 출가 전의 싯타르타 왕자가 살았던 도시의 대부분을 파탄과 박타푸르에서 촬영했다. 파탄과 박타푸르를 출가 이전의 부처가 살았던 틸로우라코트(Tilaurakor)라 한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두 도시는 오랜 세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박타푸르는 옛 왕궁과 사원들 속에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나트폴 사원(Nyatapola Temple)으로 오르는 돌계단 양 쪽에 장식된 전사, 코끼리, 사자, 그리핀, 여신의 석상들은 언제나 아이들의 놀이터다. 전설 속에서 왕국을 지켜주었던 석상들은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다. 왕국을 지키는 것이 아이들이라면 그 석상들은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이다.

사원 뒤로 난 고즈넉한 길을 돌아가다 보면,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일상을 팔고 있다. 마치 그것은 현재의 여행자가 과거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이다. 콜라 병 뚜껑을 납작하게 만들어 딱지를 치는 아이들과 술래를 뽑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아이들에게서도 어느새 아득해져 버린 과거는 다가온다.

이렇듯 박타푸르는 여행자들에게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자신을 발견하게 만들고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이 걸어 나와 말을 건네는 최면을 건다. 한낮의 태양이 사람들을 나른하게 하는 시간, 나트폴 사원 앞에 자리한 카페의 3층 테라스에 앉으면 사람들이 사원 입구에 매달린 종을 치는 것이 보인다. 신에게 자신이 왔음을 고하는 것이지만 행여 잠들었을지도 모르는 신을 깨우는 듯하다. 신의 나라에 인간이든 신이든 누군가가 깨어 있어야 한다면 신이어야 하지 않을까?

전태흥(자유기고가)

사진: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