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문화유산- 청송 옹기장 이무남씨

입력 2004-11-11 09:11:36

흙과 바람 불이 만든 독

어린 시절, 시골 집의 마당 한구석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장독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가끔 호기심이 발동해 부모님 몰래 무거운 장독 뚜껑을 열면 된장 고추장 간장 익는 짭조름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김장철 어머니가 갓 버무린 김치를 독에 차곡차곡 넣어 땅에 묻어놓으면, 겨우내 먹을 김치는 그렇게 잘 익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장독 대신 슈퍼마켓에서 된장 고추장을 사다 먹는다.

어느덧 점점 사라져가는 투박한 독, 그 그릇들을 통틀어 옹기라 부른다.

청송읍 소재지에서 안동 방면으로 국도 31호선을 따라 13km쯤 가다보면 진보면이 나온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인 이무남(66) 옹기장이 터를 잡고 있는 곳. 청송옹기(054-870-6271) 대표인 이씨는 45년 동안 고집스럽게 옹기만 구워왔다.

'옹기 제작과정을 알려달라'고 말하자 이씨는 신이 났다.

18세때 상주에서 시작한 옹기일, 그동안 수십번도 더 설명했겠지만 누가 물을 때마다 신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오색점토(적· 황· 청· 백· 흑색) 캐온 흙을 물반죽하고, 다림질(물에 개어 이기는 것)합니다.

"

흔히 옹기장들은 거친 흙을 남자, 고운 흙을 여자에 비유한다.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 되어 새 생명을 낳듯, 두 흙이 잘 섞여 튼튼한 그릇이 된다.

선이 곱고 미끈한 사기와 달리 모양과 질감이 거칠고 투박한 것이 옹기의 특징이다.

좀 거친 흙을 쓰는 것은 입자 사이로 공기가 통하게 하여 속에 든 음식이 상하지 않고 잘 발효하게 하려는 것이요, 두껍고 투박한 것은 서민들의 생활과 늘 함께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빚어 놓은 옹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하나하나 손으로 빚고 두드려 만들었기에 대칭이 완벽하게 맞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친근감이 있다.

마치 한 배에서 나고도 저마다 모습과 성격이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천천히 달구어지는 가마 안에서 일주일 넘게 1천250℃의 열을 견디어 완성되는 옹기들이지만 온전한 모양새로 세상빛을 보는 것은 열에 예닐곱뿐이다.

기계식 가마에 나무가 아닌 가스를 때서 만들면 일손도 덜 들고 그릇이 깨질 일도 없다.

하지만 공기를 통하게 해 장맛을 깊고 진하게 해주는 미세한 숨구멍을 그대로 보존하려면 천연의 나무만한 재료가 없다.

옹기장 이씨가 정성스레 불을 피운 가마 속에서 긴 단련의 시간을 이겨낸 그릇만이 음식의 깊은 맛을 내는 '명품'이 된다고 했다.

한때 이씨 가족도 이 일을 접으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직하게 수작업을 고집해 온 정성이 알려지면서 이곳 가마터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아들은 전통 옹기의 멋을 연구하고 되살리는 일에 열중하며 오늘도 가업을 이어간다.

"플라스틱 그릇과 도자기가 판을 쳐 힘들다"고 하지만 사실 청송 옹기는 주문 제작만 하며 판로도 탄탄한 편이다.

이씨는 아들 호영(37)씨가 있어 늘 든든하다.

자신도 벌써 3대째이지만 호영씨도 일찌감치 이 길로 들어섰다.

너무 힘들고, 채산성도 떨어져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 한 일임을 알기 때문에 더욱 고맙다.

"사람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빚어내시고 알맞은 불과 연료와 바람으로 단련하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문득 물레 앞에서 떠올리게 됩니다.

" 청송·김경돈기자 kd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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